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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메디치가와 르네상스(1): 콰트로첸토(Quattrocento)

by 토트마트 2025. 12. 30.

지난번 글을 보니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습니다. '피렌체와 르네상스'라 해놓고, 주로 '메디치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더군요.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이번 글 시작하기 전에 '피렌체와 르네상스'에 대해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르네상스에 관한 대부분의 글이나 유튜브 영상 등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는가'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 중세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공화정이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2. 영국-플랑드르-피렌체로 이어지는 양모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 그 밖의 상업, 금융업의 발달, 3. 로마의 유산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위치, 4. 비잔틴 멸망 후 학자들의 유입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추가하여, 역사적 천재들이 10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피렌체에 한꺼번에 나타난 이상 현상을 들고 싶습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베네치아가 오히려 더 르네상스의 대표 도시가 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베네치아도 르네상스가 일어난 도시 중 하나이지만, 그 비중을 볼 때 피렌체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이제는 지난번에 이어 본격적으로 메디치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전 글을 수정, 추가하는 글이기 때문에 말투가 바뀌는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르네상스의 시작

르네상스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좁게 본다면 1401년부터 1564년까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401년은 마사초가 태어난 해이고, 1564년은 미켈란젤로가 돌아간 해이다. 마사초가 워낙 요절(27세 사망)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르네상스 회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원근법을 최초로 회화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기억할 만하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마사초의 '성삼위일체'를 보기 위해서이다.

*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의 시대 구분은, 1300년대(트레첸토), 1400년대(콰트로첸토), 1500년대(친퀘첸토)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중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라는 르네상스 3대 거장이 왕성히 활동했던 1500년대 전반기는 하이 르네상스라 하여 최대 전성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하면서 르네상스의 기틀을 이룬 1400년대(콰트로첸토)를 저는 더욱 주목하고 싶습니다.

 

르네상스의 마지막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 한명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나이로 보아서는 다른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보다 각각 23살 어리고, 8살 많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89세)했기 때문에 그의 생이 르네상스 전성기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 시대구분이라는 것이 후대의 편리를 위해 인위적으로 시간을 나눈 것일 뿐, 실제로 무를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르네상스가 미켈란젤로의 죽음(1564년)으로 끝이 났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후반기는 매너리즘 시대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다만, 저는 여러 르네상스 글과 영상을 보면서, 산 조반니 세례당 청동문 경연을 하였고 마사초가 태어나기도 한 해인 1401년과 미켈란젤로가 사망한 해인 1564년을 르네상스의 시작과 끝으로 정하는 것이 르네상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임의로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쾨트로첸토(Quattrocento)

잠깐 다른 길로 샜지만, 다시 돌아오면 1400년대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중요한 시기로, 그중 전반기를 코시모 시대, 후반기를 로렌초 시대라 할 수 있다. 코시모는 블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도나텔로, 프라 필리포 리피, 베로키오 등의 예술가를 후원했고, 그 손자인 로렌초는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을 후원했다. 또한 코시모는 별장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열어 많은 철학가를 양성했고 로렌초도 자택에 예술가를 위한 학교를 만들었다. 거기서 미켈란젤로가 코시모의 눈에 띄어, 정식 양자는 아니지만 거의 아들처럼 길러졌다고도 한다. 어린 미켈란젤로가 나이 든 판을 조각하는데 코시모가 그것을 보고 노인의 치아가 너무 튼튼해 보인다고 하자 곧바로 두 개의 치아를 깨어 코시모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특이한 것은 로렌초가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했음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물론,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에 그를 소개해주어서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최후의 심판 등을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레오나르도와 같이 당시가 아니라 인류사 전체를 보아도 역대급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자기 곁에 두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했다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레오나르도는 그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것에 손을 대는 습관 때문에 주문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타입이기는 했다.

 

조코피로 피조줄 로줄이알

참고로, 저는 메디치가의 수장들을 앞 글자를 따서, '조코피로 피조줄 로줄이알'이라고 외웠습니다.

 조반니 - 코시모 - 피에로 - 로렌초 - 피에로 - 조반니 - 줄리아노 - 로렌초 2세 - 줄리오- 이폴리토 - 알렉산드로입니다.

 

조코피로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드렸고, 그다음 피조줄은 부자관계가 아니라 세 명이 형제입니다. 로렌초가 1492년에 죽고(글을 쓰다 보니 1492년이 스페인이 레콩키스타(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것)를 완성한 해이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해이네요), 그 아들 피에로 피렌체의 권력자가 되었으나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에 왕위 계승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길을 비켜달라고 쳐들어오게 됩니다. 말하자면, 정명가도가 아니라 정나가도(나폴리를 정벌하기 위해 길 좀 빌려달라)인셈이지요. 조선과 달리 피에로는 길을 빌려주었는데, 집권자의 그런 나약함에 시민들이 분계를 하여 메디치 가문을 쫓아내게 됩니다. 그 시절 메디치가 피렌체의 유력 가문이기는 해도 엄연히 피렌체의 국체는 공화제였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메디치가는 그렇게 유럽을 떠돌다가 1512년에 다시 피렌체에 돌아와 다시 권력을 잡게 됩니다. 그때의 메디치가 수장은 줄리아노였습니다. 다만, 줄리아노의 힘으로 다시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고, 그 위의 형 바로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입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조반니가 바로 1년 뒤 1513년 교황 레오 10세이기 때문입니다.

줄리아노는 미술 전공자들이 많이 그리는 석고상 중 줄리앙이라고 불리는 석고상의 실제 인물로 유명합니다. 정확히는 미켈란젤로가 메디치가 사람들의 영묘를 만들 때 줄리아노 묘를 장식한 조각상의 얼굴만 석고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줄리아노의 초상화와 줄리앙 조각상은 그리 닮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미켈란제로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줄리아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상관없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줄리아노를 본 사람은 없지만 버젓이 초상화는 남아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말했을까는 의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구의 영묘인지 알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얼굴을 다르게 하였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뭐, 의도적이든 아니든 줄리앙 석고상은 줄리아노 메디치를 모델로 한 것인데, 실제 얼굴은 모델과 다릅니다.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편에는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부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