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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피렌체와 르네상스: 메디치가와 피렌체와 르네상스

by 토트마트 202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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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이야기해보겠다고 거창하게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몇 달간 개점휴업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카테고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전 글이라도 재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 모 커뮤니티에 연재하였던 르네상스 관련 글을 정리해서 올릴까 합니다. 가끔 그때 글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표현이나 잘못된 내용도 있어서 이참에 수정할 수 있으니, 저로서는 일석이조가 아닌가 합니다.

 

르네상스와 피렌체와 메디치가

 

르네상스의 역사는 피렌체의 역사이고, 피렌체의 역사는 메디치가의 역사이다.

 

메디치가가 12세기에 외부에서 피렌체로 이주하였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1400년대부터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가이다. 이때의 메디치가 수장을 나열하면, 조반니, 코시모, 피에로, 로렌초, 피에로, 조반니, 줄리아노, 로렌초2세, 줄리오, 이폴리토, 그리고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이다. 알렉산드로가 암살당하면서 코시모의 직계는 소멸하고, 방계인 코시모의 동생 로렌초의 후손인 코시모1세가 피렌체를 포함한 토스카나 공국의 수장으로서 이어지다가 1737년 마지막 잔 토스카네를 끝으로 메디치가의 피렌체 지배는 끝나게 된다.

위 이름들을 보면 중복되는 이름이 여럿 보이는데, 실제로는 미들 네임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가기 때문에 풀네임은 구분이 된다. 예를 들어, 첫번째 피에로의 풀네임은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이고, 두번째 피에로는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이다(여기서 디(di)는 영어의 of, 프랑스어의 de에 해당하는 전치사로,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먼저, '메디치가'라는 가문의 이름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두곽을 드러낸 것은 13세기 초부터였고 그 이전의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름(Medici)이 그때나 지금이나 의사 또는 약사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당시에도 메디치가의 조상이 의사나 약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다. 요즘도 여러 책이나 유튜브 등에서 메디치가를 설명하며 의사나 약사 가문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는 이름 외에는 그렇게 추정할 근거가 없으며, 역사에 드러난 시점부터 선조가 상인이나 은행가였던 가문이라는 것이 정설인 것 같다.

 

조반니 데 메디치

 

조반니 데 메디치는, 1400년대부터 시작되는 메디치가 영광의 기틀을 세운 사람으로 은행가로서 유럽 전 지역에 16개의 은행을 세워 피렌체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상업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이후의 후손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그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틀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아비뇽 유수(1309년~1377년) 이래로 최대 3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교황권의 대분열 시대를 종결한 콘스탄츠 공의회(1415년)에서 마르티노 5세가 유일한 교황으로 선임되면서, 조반니 데 메디치가 지지했던 요한 23세(발다사레 코사)가 물러나며 큰 위기를 맞이했지만, 힘 없는 요한 23세를 끝까지 거두었던 의리를 높이사 마르티노 5세로부터 바티칸의 은행 역할을 맡게 되며 메디치가가 부활함으로써, 조반니의 도박은 결국에는 큰 성공을 이루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 이후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지배하고, 나아가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된 기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코시모 데 메디치

 

조반니가 이성계라고 한다면, 코시모는 이방원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킬방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냉정하고 잔인한 면모가 있었던 이방원에 비해, 코시모는 그 초상화를 보면 느껴지듯이 온화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도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등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고, 피렌체 공의회를 개최하여 동서 교회의 화합을 도모했다. 물론,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기는 했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을 건립하고, 메디치 르카르디 궁전을 브루넬리스키의 화려한 설계 대신 미켈로초의 소박한 설계에 따라 짓도록 한 것은 모두 겸손을 중시했던 선대의 조반니 데 메디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였다.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는 평생 통풍으로 고통을 받았고, 그로 인해 집권기도 짧았고 특별한 업적도 없었다. 로렌초와 줄리아노라는 두 아들을 나은 것이 가장 큰 업적일지 모르겠다.

 

1400년대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눈다면, 전반기는 코시모의 시대, 후반기는 로렌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로렌초가 1469년 ~ 1492년으로 조금 짧지만, 메디치가의 가장 화려한 시대를 장식했다면, 코시모의 시대는 메디치가는 물론 르네상스의 기틀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마치며

예전 글을 복붙하고 조금만 수정을 하려다 추가 내용을 조금 넣는다는 것이 상당히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5편 정도의 글이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상당히 길어지는 시리즈가 될 것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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