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중 7세기를 별도로 만든 이유는 가장 중요한 세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삼국이 통일되는 세기. 신라가 통일했으니 당연히 신라 위주의 세기입니다.
한국사뿐만 아니라 역사 공부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왕의 계보를 외울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역사는 그 시대의 집권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한국사 시험에서는 시대 구분 또는 순서를 묻는 문제가 많이 나오는데, 어느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 지를 모두 외울 수 없으므로 그 당시의 왕을 기억한다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7세기, 8세기는 특히 시대 구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1)에서 삼국 초기 왕들에 대한 두문자 암기 외에, 7세기, 8세기만 두문자로 외웠습니다. 그것이, 7선진무문신 8성경혜선원 입니다.
7세기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8세기 성덕왕, 경덕왕,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입니다. 모든 왕은 아니고 중요한 왕들만 뽑았습니다.
아울러, 교과서에 정치사와 구분되어 나오는 문화사 부분도 정리했습니다.
신라는 7c 진덕여왕 때 집사부·좌이방부·창부를 설치했다.
이는 신라의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를 강화하고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위와 같이 외웠지만, 찾아보니 창부는 무열왕 때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7c 나당전쟁은 1. 마전·적성 전투, 2. 매소성 전투, 3. 금강하구 기벌포 해전이 중요하다. 백제의 복신, 도침, 흑치상지. 고구려의 검모잠, 안승.
신라가 삼국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당나라와 벌인 전쟁으로, 한반도 중남부 지배권을 확보하는 결정적 전투로 마전·적성 전투, 매소성 전투, 금강하구 기벌포 해전이 꼽힙니다. 이 전쟁은 신라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어 신라의 승리로 끝났으며, 백제와 고구려 부흥세력의 역할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삼국사회의 성격은 엄격한 계급사회이고 개인의 능력보다 친족의 사회적 위치가 중시.
삼국 시대는 골품제와 같이 신분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활동 범위가 엄격하게 제한되는 계급 사회였습니다. 특히 신라의 골품제는 개인의 능력보다 혈통을 기준으로 삼아 관직 진출, 혼인, 심지어 일상생활의 규모까지 규제했습니다.
삼국은 모두 귀족회의에서 국가 정책을 결정했다.(제가회의, 정사암, 화백회의)
삼국시대는 귀족 중심의 계급사회로, 국가의 주요 정책은 귀족회의를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각 삼국은 고유한 귀족회의를 운영했으며, 이를 통해 왕권과 귀족 세력 간 협력 또는 견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고구려 수상은 대대로이고, 백제는 상좌평, 신라는 처음(법흥) 상대등에서 뒤에(진덕) 시중으로.
삼국의 지방장관은 행정과 군사권을 겸했다(욕살·방령·군주). 통일신라는 도독.
삼국의 경제는 고리대업이 성했고, 시장이 설립되어 지방특산물이 매매되었다.
신라 화백은 만장일치, 4영지, 집단의 단결과 부정 방지, 의장은 상대등.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과 전사적 기능, 세속오계, 진흥왕 때 공인.
신라의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과 전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며, 세속오계를 통해 정신적 가치를 강조했으며, 진흥왕의 시기에 공식적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신라 골품제도는 족장세력을 통합하면서 고대왕국으로 발전할 무렵에 성립.
신라의 골품제도는 족장 세력을 통합하고 중앙집권적인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사회 신분 제도입니다.
신라 골품제도는 하한선은 동일하며, 상한선은 제한. 6두품은 학문과 종교에 주로 활동.
골품제의 상한선 제한으로 인해 6두품은 상대등(시중)이나 이찬 같은 최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이는 6두품의 정치적 불만을 초래했으며, 후기 신라(8~9세기)에서 지방 호족의 성장과 반발로 이어졌습니다.
삼국의 불교 수용은 고대왕국 체제 정비기에, 왕실에서 수용(사상의 통일). 고-소수림왕, 백-침류왕.
삼국은 4~6세기경 부족 연맹체에서 중앙집권적 고대 왕국으로 전환하며 행정, 군사, 사회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불교는 왕실과 귀족의 통합, 사상적 통일을 촉진하는 도구로 수용되었습니다.
고구려 불교는 삼론종(승량), 백제는 율종(겸익), 신라는 계율종(자장) 중심이다.
삼국의 승려는 고구려 혜량(신라국통), 백제 겸액, 신라 원광(세속오계)이 중요하다.
고구려의 경당은 장수왕 때 설치된 사립으로 지방 평민 자제에게 문과 무를 가르쳤다.
백제 사택지적비는 노장사상을, 신라의 임신서기석은 화랑의 유교 학습을 보여준다.
사택지적비 비문에는 사택지적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의 사후 추모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노장사상(노자·장자의 도가철학)의 영향을 받은 문구가 두드러집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들이 유교 경전을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회적 질서를 실천했음을 보여줍니다.
7c 고구려 연개소문은 불교를 누르기 위해 도교를 장려했다.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는 단순한 종교적 선택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의 민간예술은 소박한 전통을 보이고(토우), 귀족예술은 남북조 영향으로 세련(금동불상).
삼국의 민간예술(토우)은 소박한 전통과 민간 신앙을, 귀족예술(금동불상)은 남북조의 영향을 받아 세련된 미학을 보여줍니다. 이는 삼국의 계급사회와 문화적 교류를 반영하며, 특히 신라의 삼국 통일(7세기)과 백제의 문화 전파(일본으로의 영향)에 기여했습니다.
무녕왕릉은 전축분으로 남조의 영향을 받았고, 매지권은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매지권 (買地券) 은 '땅을 샀다'는 내용이 새겨진 석판입니다. 여기에는 죽은 왕의 영혼이 무덤터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해 토지신에게 돈을 주고 땅을 샀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묘지가 불길한 장소가 되는 것을 막고 죽은 자의 영혼이 편히 잠들기를 바라는 도교의 풍수 사상과 주술적 믿음이 반영된 것입니다.
삼국 문화는 일본에 전래되어 아스카 문화를 만들었고 백제의 영향이 가장 컸다.
삼국은 불교를 공인(고구려 372년, 백제 384년, 신라 527년)한 후 이를 일본에 전파. 백제가 538년(또는 552년) 쇼토쿠 태자에게 불교를 전파하며 아스카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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