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토트마트의 정보바다
한국사 암기법

한국사(5) 통일신라시대 : 통일신라는 중대 신문왕 때 시중의 세력 강화, 녹읍의 폐지, 관료전지급, 9주5소경

by 토트마트 2025. 9. 14.
반응형

통일신라시대는, 특히 통일 후 왕들의 업적에 대한 비교가 중요합니다. 아래에도 각 왕들의 업적에 대한 문장들이 있지만, 지난 번 소개한 두 문자 암기법에 각 왕들의 업적을 추가한 문장이 있는데, 그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7선진무문신 : 신(신문왕: 숙청작업, 녹읍폐지, 관료전지급, 중앙집권화) * 문무왕 때 통일을 했으므로, 통일 후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신문왕입니다.

8성경혜선원 : 성(성덕왕: 명군, 정전, 물시계), (경덕왕: 중국화, 녹읍부활, 불교장려-불국사, 석굴암), (혜공왕: 게이), (선덕왕: 이름 김양상, 김헌창의 난), (원성왕: 김경신, 독서삼품과)

일단, 두 문자로 대략의 흐름을 파악하고, 교과서에서 상세한 설명을 읽어보면 잘 기억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먼저 상세 내용을 보고 두 문자로 확인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중대와 하대의 구분도 중요해서, 각 시기의 대표왕인 신문왕과 선덕왕의 업적을 비교했습니다.

중대(신문왕): 김흠돌의 난, 시중, 95소경, 9서당10, 녹읍폐지, 관료전지급, 6두품 등용, 국학

하대(선덕왕): 김헌창의 난, 상대등(귀족 권한 강화), 녹읍부활, 호족(선종. 풍수지리), 원종애노의 난.

 

통일신라는 중대 신문왕 때 시중의 세력 강화, 녹읍의 폐지 관료전지급, 9주5소경. 9서당10정(민족융합정책). 국학의 설치, 6두품 기용. 

신문왕은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행정·군사·문화적 기반을 다진 왕으로, 통일신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중앙정치 조직은 신문왕 때 6전 조직을 완성하고(집사부 등 14부),

지방 조직은 9주 5소경으로 확대하고, 상수리(기인-경저리)제도로 지방을 통제했다.

상수리제도는 지방의 유력한 지배층(지방 세력가, 호족)의 자제들을 수도로 불러와 거주(사실상 인질)시키는 제도이고,

기인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로, 주로 진골 귀족이나 6두품 출신이 지방의 행정과 군사를 책임졌습니다. 이들은 중앙 정부의 정책을 지방에 실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경저리는 지방의 토착 세력 또는 지역 유지로, 중앙의 기인과 협력하여 지역의 세부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통일신라는 민족문화를 위해 백제와 고구려 출신 관리를 골품에 편입했다.


통일신라 민정문서는 농민의 노동력과 생산자원을 철저히 관리했다.

통일신라 민정문서(대표적으로 '신라 장적')는 농민의 노동력과 생산자원을 국가가 체계적·철저하게 관리한 대표적인 기록입니다.

 

통일신라 농민은 토착세력인 촌주를 통해 집단적으로 국가의 지배를 받음.

민정문서(장적) 등 공식 장부는 촌주가 협력하여 작성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과 생산자원, 인구, 토지 등이 세밀하게 중앙에 보고·통제되었습니다.


통일신라는 시장이 증설(동시 외에 남시·서시)되고 해외무역도 발달(당항성·영암·울산항)


성덕왕 때 정전의 지급은 국가의 농민지배 강화를 의미한다.

성덕왕의 정전 제도는 농민이 귀족(촌주 등)과 국가 사이의 간접관계가 아니라, 국가의 직접 관리·지배 하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발해는 소수 고구려계 지배계급, 다수 말갈계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되었다.


발해 영역은 옛고구려 땅에 +연해주 -요동이다.

발해의 영역은 고구려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지역(연해주)을 포함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요동을 상실한 것은 당나라와의 관계 및 군사적 한계로 인한 것이었으나, 발해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동북아시아의 해상 무역과 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발해 정치조직은 당의 3성6부를 모방했으나, 2원적 운영, 유교식 명칭에서 독자적이다.

발해 정치 조직은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했으나, 실제 운영은 2원적(이원적, 정당성과 기타성 분리) 구조를 띠어 정당성이 실질 집정(최고 결정기관) 역할. 유교식 관명(이부·호부 등) 대신 인·의·예·지·신·충 등 발해 고유의 덕목형 명칭을 사용(명칭에서의 독자성)하였습니다.

 

발해문화는 고구려 기반에 당문화 가미-선이 부드러워지고 웅건한 기풍


발해 정당성은 귀족합좌 의결기구로 고려 도병마사, 조선 의정부(비변사)와 비슷.

발해의 정당성은 귀족합좌 의결기구로서 당나라의 3성6부를 모방했지만, 다민족 사회의 통합과 고구려 유산을 반영한 독자적 운영 방식을 가졌습니다. 이는 고려의 도병마사와 조선의 의정부(비변사)와 기능적으로 유사하며, 귀족 중심의 합의 체제를 통해 왕권을 보좌하고 국가 통치를 안정화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입니다.


발해 외교는 당과 초기 대립에서 뒤에 친선으로. 신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

발해는 당나라와 초기 대립 후 친선 관계로 전환하여 외교적 안정과 문물 교류를 추구했으며,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와의 대립을 지속하며 자주성을 지켰습니다. 이는 발해의 다민족 국가적 특성과 신라의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외교 전략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발해사는 우리 민족사의 일부로 북진정책 추진의 바탕(실학자의 관심).

유득공의 발해고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연구로, 발해를 신라와 동등한 민족사적 위치로 평가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했습니다. 한치윤, 정약용 등도 발해의 북방 영토와 독립적 외교를 주목하며, 조선의 북방 개척과 국력 강화를 주장했습니다.

 

통일신라 문화는 국제문화 조류에 가담했고 민간문화 수준(불교의 대중화-원효)도 향상됐다.

신문왕 때 국학의 설치와 원성왕 때 독서출신과는 왕권강화와 직결된다.


강수는 외교문장가로, 설총은 화왕계와 이두를 정리했다.


김대문은 중대 진골출신, 자기문화의식(중국모방탈피),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계림잡전 저술.

 

최치원은 하대, 6두품 출신, 중국식 개혁(시무10여조) 건의, 실패 은거, 계원필경, 사산비문(사상의 복합화).


8c 중엽,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은 3층석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

경주 불국사에 위치한 석가탑(국보 제21호)에서 1966년 도굴 사건을 계기로 발굴 조사 중 발견되었습니다. 탑신 내부의 사리함 안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다른 유물들이 함께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나말 도선이 전래한 지리도참설은 (인문지리+예언도참) 신라정부 권위 약화.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를 지어 신라불교의 이해수준을 확립했다.


원효는 정토종 보급으로 불교를 대중화했다.

정토종은 아미타불의 정토(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종파로, 복잡한 교리나 수행보다는 염불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민중에게 친근했습니다.


통일신라 예술의 특징은 귀족적이고, 조화미·정제미와 조형미술 중심(5교와의 관계).

통일신라 예술은 조형미술(건축, 조각, 공예 등 입체적 예술)이 중심이었으며, 이는 불교 사찰과 탑, 불상 제작에서 두드러졌습니다. 조형예술은 화엄(전체 조화, 극락세계의 통일성), 법상(상징적 형상), 원효계(대중적 신앙과 조화미) 등 교리와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통일신라 석탑은 기단이 높고, 독특한 입체미의 3층탑.

통일신라 석탑의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3층 석탑으로, 기단-3층 몸체-상륜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다보탑, 감은사지 3층석탑 등이 유명합니다.


통일신라 고분은 횡혈식 석실분에 호석을 두리고 호석에 12지 신상을 조각(도교의 영향).


하대에는 내물계 방계 진골이 왕위계승, 무열계의 도전도 있었다(김헌창의 난).

통일신라 하대에는 내물계(내물마립간의 후손) 진골 귀족의 방계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내물계는 신라 초창기부터 이어진 왕족 가문으로, 통일 이후 중앙집권 체제가 약화되면서 방계 가문이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선덕왕(재위 780~785년), 원성왕(재위 785~798년) 등이 내물계 방계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무열계(무열왕, 김춘추의 후손)는 통일신라 중대 시기(신문왕, 성덕왕 등)에 왕권을 장악하며 신라의 통일을 이끈 핵심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대에 들어서며 내물계 방계에 밀려 왕위 계승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김헌창은 무열계 진골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김주원(무열왕의 후손)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웅주(지금의 공주)에서 장안국을 선포하며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으나, 중앙 정부의 진압으로 실패했습니다. 이 반란은 무열계의 왕위 복귀 시도와 함께, 중앙 통제력 약화와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예: 선종, 풍수지리 기반)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대 중앙정치 기강의 문란은 해상, 군진, 지방호족 세력의 독립과 민생 피폐(전국적 민란).

통일신라 하대의 중앙정치 기강 문란은 해상 세력(장보고), 군진 세력(김헌창), 지방 호족(선종, 풍수지리 기반)의 독립과 민생 피폐, 전국적 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 붕괴와 후삼국 시대로의 전환을 초래했으며, 고려의 통일로 귀결되는 역사적 전환점을 형성했습니다.

선종은 통일 전후에 전래되어 하대 도의(가지산)가 크게 보급. 주로 6두품이 9산 개창.

선종은 당나라에서 발전한 불교 종파로, 경전 중심의 교종(예: 화엄종, 법상종)과 달리 명상과 직관적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도의는 신라 하대(헌덕왕 시기)에 활동한 고승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가지산(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에서 선종을 전파했습니다. 6두품은 진골 귀족 아래의 신분 계층으로, 신문왕 시기부터 관직에 등용되었으나(예: 최치원), 골품제의 한계로 인해 고위직 진출이 제한되었습니다. 이들은 선종의 수행 중심 사상에 공감하며 새로운 사상적·문화적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6두품 출신 승려들은 지방의 산악 지역에 사찰을 세우며 선종을 보급했고, 이는 신라 하대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합니다.

 

10c초 후백제는 남으로 오월, 북으로 거란과 무역. 고려에 대항했다.

10세기 초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가 약화되면서(골품제 한계, 호족 성장), 후백제는 충청·전라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후삼국(후백제, 후고구려, 신라)의 하나로 부상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