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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암기법

한국사(7) 조선전기 : 이성계의 요동정벌은 공민왕 때 요양 점령, 우왕 때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적 실권 장악

by 토트마트 202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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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쉬었던, 한국사 암기법이미다. 이번 편은 지난 번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전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근현대사 범위 출제를 자제했던 2000년대 이전 시험은 물론, 그 후 근현대사 범위 출제가 늘어난 요즘까지도 조선전기는 자주 출제되는 범위입니다. 다만, 그만큼 시험에 자주 나오는 부분은 많이 알려져 있어서 한 번 정리를 잘 해두면 잘 틀리지 않을 수 있으니, 이번에 잘 정리해두시기 바랍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은 공민왕 때 요양 점령, 우왕 때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적 실권 장악

이성계는 고려 말기 요동 정벌을 통해 군사적 기반을 다졌으며, 공민왕 시기 요양 점령으로 명나라와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우왕 때 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 부패한 조정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조선 건국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으며, 무신의 정치적 실권 장악을 통해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확보한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결과적으로 고려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신왕조 수립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온건파 사대부는 다수 점진개혁파로, 고려 왕조 테두리 안에서의 개혁을 주장했다. 

온건파 사대부는 급진적 혁명보다는 고려 왕조 내 점진적 개혁을 통해 사회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온건파 사대부의 대표로는 정몽주를 들 수 있습니다.

 

과전법의 실시로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과 농민의 조세 부담이 줄어들었다.

과전법은 토지를 사대부에게 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고, 농민의 과도한 조세 부담을 완화하여 국가 재정의 안정성을 높였습니다. 이 제도는 조선의 지주 중심 경제 구조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이었으나, 점점 분배할 토지가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훈구파와 사림파로 세력이 갈리는 경제적 계기가 됩니다.

 

태종은 권력구조를 왕권 중심으로 바꾸고, 국가수입의 증대를 위해 여러 조치 단행.(6조직계제, 사병혁파와 호패제도)

 태종은 의정부 중심의 분산된 권력을 왕권 중심으로 재편함으로써 왕의 절대적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이는 조선 왕조의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6조직계제는 행정 효율성을 높였고, 사병 혁파와 호패제도는 사병의 폐단을 제거하며 인구·세금 관리를 강화하여 국가 수입을 증대시켰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왕권 안정과 재정 건전성을 동시에 추구한 실용적 개혁으로, 후대 왕들의 통치 모델이 되었습니다. 중앙집권적인 태종과 세조, 그 사이 분권적인 세종의 경향을 이해하면 암기하기가 쉽습니다.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와 위민정책, 영토확장, 문화진작 정책을 실시했다.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신권을 존중하는 조화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이는 이상적인 군주 통치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한글 창제 등 위민정책은 백성의 삶을 중시한 인본주의를 반영하고, 영토 확장(여진·왜 정벌)과 문화 진작(과학·예술 장려)은 국가의 번영을 위한 포괄적 전략이었습니다. 이 정책들은 조선의 황금기를 열었으며, 후세에 '성군'의 기준으로 남아 문화적 유산을 풍부하게 했습니다.

 

세조는 왕권 재확립 및 부국강병책 추진. 호불정책-원각사, 간경도감. 경국대전 시작. 성종은 제도의 완비(경국대전에 준거한 법치국가 마련), 도첩제 폐지. 경국대전 완성

 세조는 세종 이후 약화된 왕권을 재확립하며 부국강병을 추구하였고, 호불정책(불교 탄압 완화)은 불교의 문화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국가 통제를 유지하는 균형을 보여줍니다. 원각사·간경도감은 불교 경전 간행으로 민간 포용을 시도하였으며, 경국대전 시작은 법치주의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성종은 이를 완성하며 도첩제 폐지로 토지 관리를 공평화하고, 법치 국가를 완비하여 조선의 제도적 안정성을 높였으나, 이는 왕권 중심의 통합을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의정부는 재상합의제(우리나라 정치제도의 특색 있는 전통)

의정부는 조선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재상합의제를 통해 다수결 원칙을 적용하였으며, 이는 왕의 독단을 방지하는 한국 고유의 정치 전통을 형성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고려의 의종부와 달리 합의 중심으로 안정적 의사결정을 강조하여 중앙 정치의 균형을 유지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왕조의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후대에 지속된 제도적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조선의 6조는-고려와 달리-정책 결정에도 참여(기능적 분화와 통일성)

조선의 6조는 고려의 6조와 달리 단순한 행정 집행을 넘어 정책 결정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는 기능적 분화와 전체 통일성을 동시에 추구한 점이 특징입니다. 각 조의 전문화된 역할 분담은 행정의 세밀함을 더하였고, 왕과 의정부의 감독 아래 정책의 일관성을 보장하였습니다. 이 구조는 조선의 중앙집권적 정치 체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왕권 강화기구로는 승정원, 의금부. 왕권 견제기구는 언론 삼사이다.

승정원과 의금부는 왕의 직접적 지휘 아래 왕권을 강화하는 기구로, 정책 집행과 범죄 수사를 통해 왕의 권위를 뒷받침하였습니다. 반대로 언론삼사(사헌부, 사무원, 홍문관)는 왕의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여 권력 남용을 방지하였습니다. 이 균형적 설계는 조선 정치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조선은 여론정치의 일환으로 경연, 상소, 구언, 순문 등이 있고, 학술 정치로는 홍문관, 춘추관, 예문관이 뒷받침

조선의 여론정치는 경연(학술 토론), 상소(청원), 구언(직언), 순문(순환 문서) 등을 통해 백성과 신하의 의견을 왕에게 전달하는 제도로, 민본적 통치를 실현하였습니다. 학술 정치의 기반으로는 홍문관, 춘추관, 예문관이 학자 양성과 사서 편찬을 담당하며 지적 토대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왕권과 여론의 조화를 통해 조선의 정치 문화를 풍부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의 지방조직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지방자치기능을 조화시킴

조선의 지방 조직은 중앙의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면서도 부윤, 목사 등의 지방관에게 자치 기능을 부여하여 행정의 유연성을 확보하였습니다. 이는 8도 체제와 수령 중심의 구조로 구현되었으며, 중앙의 지침을 현지 실정에 맞게 적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왕조의 안정적 통치와 지방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하였습니다.

 

군역은 양인개병과 병농일치원칙, 16-60의 농민 장정은 누구나 군역(정병, 보인)을 짐

조선의 군역 제도는 양인 중심의 개병제를 통해 모든 농민 장정(16-60세)을 정병이나 보인으로 동원하였으며, 병농일치 원칙으로 평시 농업과 전시 군사를 병행하였습니다. 이는 국방력 강화와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부담으로 농민 생활을 압박하는 측면도 있었으나, 조선의 군사 체계를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5위의 중앙군과 영진군인 지방군은 유기적 연결

조선의 5위 중앙군과 영진(지방 방어군)은 중앙 지휘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국적 국방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습니다. 중앙군은 수도 방위를, 지방군은 지역 수비를 담당하며 상호 보완하였습니다. 이 연결은 조선의 중앙집권적 군사 체계를 상징하며, 외침에 대한 효과적 대응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진관체제는 세조 이후로 전국군현을 지역단위 방위체제로 편성하여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일치

세조 이후 도입된 진관체제는 전국 군현을 지역 단위 방위 체계로 재편하여 행정과 군사 조직을 일치시켰으며, 이는 지방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각 진(鎭)과 관(館)은 방어와 훈련을 병행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조선의 군사적 안정성을 강화하고, 행정-군사 통합의 모델로 자리 잡았습니다.

 

선초 교육은 학생의 면역, 사농일치, 국비부담 등이 특징이며 교육의 기회 확대

조선 선초 교육은 성균관 등의 학생에게 면역(세금 면제)과 사농일치(학문과 농업 병행)를 보장하며 국비 부담으로 운영되어 교육 기회를 확대하였습니다. 이는 양반 중심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지식인 계층 확대와 국가 인재 확보에 기여하였습니다.

 

조선의 기술교육은 해당 관청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정원, 지역 특성을 살린 교과 내용

조선의 기술 교육은 각 관청에서 실시되었으며, 인구 비례에 따른 정원을 두어 공평성을 유지하고 지역 특성을 반영한 교과로 전문성을 키웠습니다. 이는 농업, 공예 등 실용 기술을 중시하였습니다. 이 체계는 조선의 경제·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었으며, 실학 전통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15c 과거는 문·무과의 실시로 문무 양반제가 확립되었고 능력중심의 사회였음

15세기 과거 제도는 문과와 무과를 병행하여 문무 양반제를 확립하였으며, 능력 중심의 선발로 사회 이동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인재 등용을 반영합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엘리트 계층을 다각화하고,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하였습니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여말 특권층을 격하시키고 하층민의 지위 향상을 꾀함

조선의 신분 제도는 고려 말 특권층을 격하시킴으로써 권력 집중을 방지하고, 하층민(노비 해방 등)의 지위를 향상시켜 사회 평등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평등 이념에 기반합니다. 이 개혁은 조선의 사회 안정과 도덕적 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15c는 양천제 원칙하에 양인의 수를 늘려 국가수입 기반을 늘리는 방향

15세기 양천제는 양인과 천민의 구분 원칙 아래 양인 수를 확대하여 국가 세수 기반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노비 해방과 신분 이동을 통해 인구 구조를 조정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경제적 안정과 행정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선초에는 이앙법이 남부 일부 지방에 보급되고, 시비법의 발달로 휴경지가 없어졌다.

벼농사 이앙법이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효율적 생산이 가능해졌고, 비료 사용(시비법)이 늘면서 논의 휴경지가 줄었습니다.

 

조선 토지제도는 과전법→직전법(세조)→관수관급제로 보완(성종)→직전법마저 폐지(명종)하여 농장 지주제화

조선 토지 제도는 과전법으로 시작해 세조의 직전법, 성종의 관수관급제 보완, 명종의 직전법 폐지로 이어지며 점차 지주제화되었습니다. 그로 인한 농민 착취 증가로 사회 불안을 초래하였습니다.

 

선초부터 공물은 과다배정, 수송, 저장 등의 불편으로 방납의 폐단이 극심

공납 제도는 지방 특산물 과다 배정과 수송·저장 불편으로 인해 현물 대신 방납으로 변화되면서 폐단이 심각하였습니다. 이는 재정 관리의 미숙을 드러냅니다. 결과적으로 국가 수입 불안정과 지방 부담 증가를 야기하였습니다.

 

초기 상공업은 국가가 국가와 국민에게 다 같이 이익을 주는 방향(관장제 공장안, 금난전권)

조선 초기 상공업은 관장제(국가 직접 수공업 생산과 장인을 관리, 통제)와 금난전권(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판매권)으로 국가와 국민의 공익을 추구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조선의 경제 자립성을 강화하였으나, 상업 발전을 제한하였습니다.

 

초기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는 자급자족에 치중-국내상업, 대외무역, 화폐유통이 부진

조선 초기 경제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구조로 인해 국내 상업, 대외 무역, 화폐 유통이 부진하였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농본주의를 반영합니다. 결과적으로 경제 안정은 유지되었으나, 성장 잠재력을 억제하였습니다.

 

태조 때 정도전은 스스로 진도를 작성하여 요동수복 계획을 수립했다(대명관계 악화).

조 이성계의 참모였던 정도전이 직접 요동 회복을 위한 진도를 만들며 대외 정책을 주도했고, 그 과정에서 명나라와의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선초 여진족과는 화전 양면책으로 진보설치, 무역소(경원, 경성), 북평관을 설치

조선 선초 여진족 정책은 화전(화친·전쟁) 양면책으로 진보(진출 방어소)를 설치하고, 무역소(경원·경성)와 북평관을 통해 교류를 도모하였습니다. 이는 북방 안정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접근은 조선의 실리적 외교를 상징합니다.

 

선초 일본과는 화전 양면책으로 쓰시마 토벌(이종무) 및 삼포 개항→계해약조로 이어지는 제한 조공무역

일본에 대해서도 교류와 군사 압박을 병행하여, 쓰시마 토벌(1419년 이종무), 부산 등 삼포 개항, 대마도주와의 계해약조(1443년) 체결 등 조공무역 체제를 제한적으로 운용했습니다.

 

15c 훈구파는 관학과 집현전을 통해 양성되어 15c 민족문화 창조.(성리학+a, 사장중시)

집현전 등 국가기관에서 양성된 훈구파 관료들은 유학과 고유 문화를 결합한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이들은 국가 정책, 교육, 문예 모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16c 사림파는 부국강병과 물리적 공리주의를 배격하고 의리와 도덕 숭상(성리학 only, 경학중시)

사림파는 부국강병 등 현실적 이익보다 도의와 원칙, 성리학 경전 중심의 학문을 중시하면서 이상주의적인 정치 문화를 이끌었습니다.

 

불교는 국가지도 이념의 지위는 상실. 그러나, 종교로서의 기능, 포용과 융화의 철학, 전통과 자주적 세계관

불교는 조선 초 정부의 억압으로 국정에서 밀려났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었고, 포용·화합적 가르침과 전통적 종교로 정착해갔습니다.

 

15c 도교는 폐단은 없애고 무의 존중과 하늘에 제사로 문약과 사대를 보완했다.

15세기 도교는 폐단을 제거하고 무(武) 존중과 천제(하늘 제사)를 통해 문(文)과 사대주의를 보완하였습니다. 이는 성리학의 균형적 보조 역할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사상 다양성을 더하였습니다.

 

선초 민간신앙은 국가신앙으로 흡수(무당을 국가에서 채용, 삼신숭배를 국조숭배로)

무당이나 삼신숭배 등 민속 신앙이 국가 제사에 부분적으로 흡수되며 공적인 신앙 체계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는 전통과 새로운 질서의 조화를 꾀한 모습입니다.

 

15c 역사 서술(훈구파)는 자주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단군을 중시(동국통감)

1훈구파 역사가들은 고유 역사의식(단군 신화의 강조)과 주체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역사서인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습니다.

 

16c 역사 서술(사림파)는 존화주의적 소중화의식을 바탕으로 기자 중시(동사찬요)

16세기 사림파 역사 서술은 소중화(소국 중화) 의식을 바탕으로 기자(중국에서 고조선으로 왔다는 성인)를 중시한 동사찬요로 중국 중심 질서를 수용하였습니다. 이는 유교적 국제관을 반영합니다. 이 관점은 조선의 외교적 안착을 도왔습니다.

 

18c 실학시대 역사 서술은 민족의 정통성 회복과 주체성 확립에 초점. 반도사관 탈피(해동역사)

18세기 실학 시대 역사 서술은 해동역사로 민족 정통성 회복과 주체성을 강조하며 반도사관(반도 열위 의식)을 탈피하였습니다. 이는 실증적 접근을 통해 자주성을 추구합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조선 전기 지도와 지리지는 중앙집권과 국방강화에 중점(동국지도-최초실측, 혼일강리도-동양최초세계)

조선 전기 지도·지리지는 동국지도(최초 실측)와 혼일강리도(동양 최초 세계지도)로 중앙집권과 국방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과학적 측량을 도입합니다. 이 업적은 조선의 지리학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였습니다.

 

성종 때 경국대전은 영조 때 속대전, 정조 때 대전통편, 고종 때 대전회통으로 보완됨

성종의 경국대전은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 고종의 대전회통으로 지속 보완되어 법치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왕조의 법전 전통을 보여줍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하였습니다.

 

선초 농서로는 농사직설(정초, 실제 경험), 강희맹의 금양잡록, 사시찬요 등 → 17c 농가집성

조선 선초 농서로는 정초의 농사직설(실제 경험 기반), 강희맹의 금양잡록, 사시찬요 등이 있으며, 이는 17세기 농가집성으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이는 농업 실증 지식을 축적합니다. 이 문헌들은 조선의 농업 발전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선초 의약서로는 향약집성방, 의학서는 의방유취(의학백과사전) → 17c 동의보감

조선 선초 의약서로는 향약집성방(민간 약재)과 의방유취(의학 백과)가 있으며, 이는 17세기 동의보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의학의 체계화를 추구합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의학의 세계적 수준을 달성하였습니다.

 

선초 역서로는 칠정산(중국과 아라비아 회회력 참조). 수학서-산학계몽(아라비아 영향)

조선 선초 역서로는 칠정산(중국·아라비아 회회력 참조)으로 정확한 달력을 만들었고, 수학서 산학계몽은 아라비아 영향을 받아 수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과학 기술 장려를 반영합니다. 이 업적은 조선의 천문·수학 수준을 높였습니다.

 

15c에는 군주도 학자도 과학기술장려, 격물치지의 경험적 학풍, 세계적 문화수준

15세기 조선은 군주와 학자가 과학 기술을 장려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험적 학풍을 통해 세계적 문화 수준을 달성하였습니다. 이는 세종 시대의 꽃을 피웁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과학 유산을 풍부하게 하였습니다.

 

15c 한문학은 사장을 좋아하는 관료문인들(서거정-동문서)에 의해 스스로 자기문화를 가지려는 노력

15세기 한문학은 사장(역사)을 좋아하는 관료 문인(서거정의 동문선 등)에 의해 자주적 문화를 추구하는 노력을 보였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문학 전통입니다. 이 움직임은 조선의 지적 독창성을 강조하였습니다.

 

15c 그림은 낭만적 진취적인 산수, 인물화 중심(화원 및 관료문인 화가)

15세기 조선 그림은 낭만적·진취적인 산수화와 인물화를 중심으로 화원과 관료 문인 화가가 주도하였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자연관을 반영합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미술의 독자성을 확립하였습니다.

 

조선의 건축공예는 귀족적, 사치적, 인공적이라는 3단어는 필히 제외된다(화각공예)

조선의 건축·공예는 귀족적·사치적·인공적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피해야 하며, 화각공예처럼 실용적·민중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리학적 검소함을 반영합니다. 이 관점은 조선 문화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합니다.

 

선초 그림은 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대 미술에 영향(수문, 문청의 도일)

조선 선초 그림은 수문·문청의 도일로 일본 무로마치 막부 미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문화 교류의 증거입니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미술사에서 조선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15c 과전법은 세조 때 직전제 실시로 농장 확대, 성종 때 관수관급으로 보완했으나, 명종 때 직전제마저 폐지

15세기 과전법은 세조의 직전제 도입으로 왕실 농장 확대를 초래하였으나, 성종의 관수관급제로 보완되었고, 명종 때 직전제 폐지로 지주제화되었습니다. 이는 토지 불평등을 심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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