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한국사 시험에서든 자주 출제되는 시대인 조선 후기를 설명하겠습니다. 중요한 부분이다보니 내용이 많아져서 상, 하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6세기 농장의 확대는 국가수입 감소, 농민 생활 궁핍, 소작농의 증가(병작반수제화).
지주층의 토지 집중으로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러한 농장 확대는 조세 기반의 약화를 초래하여 국가 재정이 불안정해졌고, 농민의 빈곤이 사회적 불만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조선 사회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고, 지방 양반의 경제적 세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납은 호세로서 초기부터 문제점(과다부과, 수송, 저장 등 문제), 방납의 폐단으로 16c 농민의 가장 큰 부담.
조선시대에서 '호세'란 ‘호’를 기준으로 부과하는 세금 또는 부담을 뜻합니다. 여기서 '호(戶)'는 하나의 집 또는 세대를 의미하며, 보통 가구 단위로 조세나 역(군역, 요역, 공물 등 각종 국가 의무)이 부과되었습니다. 공납 제도는 실제로 물품을 바치는 대신 중간 상인(방납업자)이 대신 납부하는 형태로 변질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과도한 수탈을 당했으며, 공물 수송 과정의 비효율과 부패로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이는 대동법의 실시를 촉진한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군역은 선초 보법이, 15c 말 대립제로, 16c(중종 때) 방군수포제 실시로 군대 질 저하, 농민부담 증가.
조선 전기 군역은 보법(정병 중심 병농일치)에서 15세기 후 대립제(돈을 주고 대리 입대), 16세기 중종 이후에는 방군수포제(군역 면제를 위해 돈 납부)로 변화했습니다. 대립제와 방군수포제의 확산은 실제 군역을 위한 인력은 줄어들고, 장정의 군복무 부담이 경제적 부담이 되어 농민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제의 질 저하, 실질 군사력 약화, 농민층의 경제적 고통 심화 등 부작용이 속출했습니다. 이는 국방력 약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동시에 초래했습니다.
환곡은 춘대추납을 통한 빈민구제, 의창에서 상평창으로, 모곡의 고리대화.
처음에는 흉년 대비를 위한 구휼제도였지만, 점차 관리의 부패로 본래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관리들은 고리로 곡식을 빌려주며 농민을 착취했고, 환곡은 빈민구제가 아닌 수탈의 수단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민란 발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6c 사림은 무과와 기술직을 기피, 문학과 그림도 잡기라 기피했다.
사림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하며, 무예나 기술직을 비천한 일로 여겼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의 기술 발전과 실용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대신 성리학 중심의 학문이 강화되어 관료체계가 더욱 경직되었습니다.
16c 상민은 교육기회 축소, 양반 면제의 부담까지 맡아 지위가 하락됨(노비와 비슷).
양반층이 각종 조세와 역을 회피하면서 그 부담이 상민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교육 기회 또한 제한되어 사회적 신분 상승이 불가능해졌고, 사실상 상민층은 반노비 수준의 경제적 피폐 상태에 놓였습니다. 이런 구조적 불평등은 조선 후기 민중 저항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중종 때 조광조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의 등용을 꾀했고, 소격서를 폐지하고, 향약 실시.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급진적 개혁은 훈구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현량과는 인재 등용의 새로운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개혁은 기묘사화로 좌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후대 사림의 정치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림의 향촌사회 기반은 서원, 향약, 유향소(지방자치) 등이다.
이 제도들은 사림이 지방에서 권력을 확립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서원은 학문 연구와 지방 지식인 양성의 중심지가 되었고, 향약은 도덕 규율을 통해 주민 통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림은 중앙의 훈구 대신 지방을 지배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향약은 사림양반의 농민에 대한 지배력 강화, 국가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향약을 통해 사림은 도덕과 예의의 이름으로 향촌 사회를 통제했습니다. 이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지방 자치를 강화했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의 직접 통제력은 약화되었습니다. 향촌사회는 사림 중심의 자율질서로 재편되었습니다.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 세계(주리론)와 경험적 현실 세계(주기론)를 집대성했다.
이이는 주리론의 이상주의와 주기론의 현실주의를 통합하려 했습니다. 그는 경세론적 실천을 강조하며, 정치와 사회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 실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5c 법주사팔상전은 보은에 있고, 보은은 동학집회로, 문석봉의 을미의병(최초 의병 봉기)로 중요하다.
법주사팔상전은 조선 후기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입니다. 보은은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법주사팔상전 → 보은 → 동학집회, 문석봉 을미의병'으로 연상되도록 연결하였습니다.
임란 전 정세는 쓰시마 정벌에서 삼포개항, 계해약조, 삼포왜란, 임신약조, 사량진왜변, 정미약조, 을묘왜변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평화를 모색했으나, 무역 분쟁과 왜구 침입으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잦은 조약 체결과 왜변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드러내는 전조였습니다. 이는 결국 임진왜란의 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순신은 1차 옥포, 2차 사천(거북선 사용), 3차 한산도(학익진),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대승.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술적 우위를 극대화한 명장이었습니다. 거북선을 활용한 기동전술과 한산도의 학익진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손꼽히는 전략이었습니다. 그의 승리는 국난 극복과 민족적 자존심 회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옥포 → 사천 → 당포 → 당항포 →율포.적진포 → 한산도 → 부산포 → 명량 → 노량 으로 이어지는 전투의 순서를 묻는 시험도 있었으나, 요즘은 그렇게 지엽적인 문제는 많이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다만, 최초의 전투인 옥포 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사용되지 않았다든지, 3대 전투이자 영화 3부작인, 한산도, 명량, 노량은 잘 기억해두어야 할 전투입니다.
광해군의 혁신정치는 주기론의 영향을 받은 북인파의 뒷받침으로 부국강병과 실리추구 외교.
광해군은 현실적 국정 운영을 위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이는 실리 외교의 선구적 사례로 평가되지만, 명분론을 중시한 사림의 반발로 폐위되었습니다. 그의 정책은 조선 후기 개혁정치의 시초로 재평가됩니다.
정통사림의 북벌론(서인→노론)에 대해 남인과 소론은 무모성을 비판. 내정개혁 주장.
서인은 청을 오랑캐로 규정하며 북벌을 주장했지만, 실질적 국력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남인과 소론은 군사적 복수보다 내정의 개혁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정치 담론은 명분론과 실리론의 대립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호란 당시 척화파는 정통주리파, 주화파는 최명길 등이며 내면적으로 양명학 수용.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려 했지만 현실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면 주화파는 국가 보존을 위해 굴욕적인 화의를 선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학자들은 양명학의 실천적 사고를 수용하며 현실 정치의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최고 합의 기구화된 비변사에는 3정승, 공조 제외 5조판서, 군영대장, 유수, 대제학 등 전현직 고관이 참석.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 국가 최고 정책결정기구로 발전했습니다. 본래는 국방 회의체였으나 점차 행정·재정·인사권까지 장악하며 권력 집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왕권 약화와 관료 권력의 강화로 이어졌습니다.
5군영은 서인이 국방력 강화 명분으로, 서인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됨.
서인 정권은 병자호란 이후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5군영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각 군영의 지휘권이 분산되어 효율성이 낮았고, 실제로는 정권 유지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는 후대에 군영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어졌습니다.
5군영은 종합계획 없이 그때그때 설치, 병종과 재정기반이 각기 다르다.
체계적 운영이 부재한 채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군영들은 행정적 통일성이 결여되었습니다. 각 군영이 자체 재정을 운영하면서 부패가 만연했고, 군사력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선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군제의 비효율성을 상징합니다.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 아래로는 노비까지(신분 변동요인), 농한기 훈련, 평시에는 향촌을 지키고 유사시 전투.
속오군은 신분에 관계없이 조직된 향토 방위군으로, 일종의 민병체계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훈련과 장비 부족으로 실효성이 낮았고, 전쟁 시에는 제대로 동원되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회적 신분 이동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영조는 탕평책, 병권 장악, 서원 정리(300여개), 균역법 실시,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속대전.
영조는 붕당 간의 대립을 완화하고 국정 안정을 꾀했습니다. 서원 정리와 균역법을 통해 농민 부담을 경감시키고 재정 합리화를 추진했습니다. 또한 법전과 문헌 편찬으로 제도적 통치를 강화하여 조선 후기 개혁정치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정조는 탕평책, 장용영 설치, 규장각 설치, 통공정책, 공장안 폐지, 대전통편, 동문휘고 등.
정조는 개혁군주로서 중앙집권 강화와 실용행정을 동시에 추진했습니다. 규장각을 통해 학문 진흥과 인재 등용을 이루고, 통공정책으로 상공업 활성화를 도모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개혁과 문화 부흥의 절정기로 평가됩니다.
조선 후기 전세 수입 감소는 수세지 감소(면세전 증가), 전세율의 감소(영정법 실시-인조) 때문.
영정법은 조세의 부담을 경감시키려는 목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면세전의 확대와 토지 집중으로 세입이 줄면서 국가 운영의 어려움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공납과 군역의 부담 전가로 이어졌습니다.
대동법의 실시는 호세의 전세화로 농민의 부담은 줄고, 지주부담은 늘고, 국가 수입 증가.
'호세의 전세화'란, 세금 부과 기준이 ‘세대 단위(호)’에서 ‘토지 단위(전)’로 바뀐 현상을 의미합니다. 대동법은 공납 제도의 폐단을 해결한 획기적 개혁이었습니다. 쌀로 세금을 통일하면서 납세의 공평성이 높아졌고, 농민의 부담이 완화되었습니다. 동시에 중앙 재정이 안정되어 상공업 발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대동법 실시는 상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상업자본가가 생겼고, 화폐유통도 촉진, 상업도시 생김(강경, 원산, 삼량진).
공물의 쌀 거래가 상업적 유통망을 활성화시켰습니다. 공인과 도고 등 상업자본가가 등장하면서 도시경제가 성장했고, 지방시장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이는 자급자족 경제에서 시장 중심 경제로의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부담의 감소, 양반 지주부담 증가(선무군관포), 국가수입 그대로→뒤에 다시 폐단.
균역법은 군역 부담을 줄이려는 개혁이었지만, 군포 대신 납부되는 선무군관포가 다시 농민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재정 보완책이 부패로 변질되었습니다. 결국 제도 본래의 취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후기 이앙법의 전국 보급과 견종법의 보급은 광작을 가능케 했고, 광작은 농민계층 분화 촉진.
이앙법의 확산으로 벼농사 생산성이 높아졌고, 지주들은 대규모 경작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반면 소농들은 몰락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전은 계층 분화와 농촌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습니다.
후기에는 실학적 농법(산림경제, 임원경제지)과 상업작물의 대두(호박, 고추, 담배)로 유통경제가 더욱 활기를 띰.
실학자들은 경험과 실용을 바탕으로 농업 기술 혁신을 제시했습니다. 상업작물 재배는 농민의 현금 수입을 확대시켰고, 지역 간 교역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점차 시장 중심의 경제구조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기에는 도조법이 생겨나(도지권-개간, 축재, 매매 가능), 소작인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더러는 부를 축적.
도조법은 토지 개간과 경작권 거래를 인정함으로써 경작자의 권익을 강화했습니다. 일부 소작농은 토지 소유에 가까운 경제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분적 경직성을 완화하고, 새로운 중간계층의 등장을 촉진했습니다.
후기 납포장의 증가와 공장안의 폐지는 민간수공업의 발전을 의미.
국가 통제에서 벗어난 민간 수공업은 자율성과 생산성을 확보했습니다. 납포장은 관청의 수요를 민간이 충당하는 형태로 성장하며 상업과 제조업의 연계를 강화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산업 구조의 변화 신호탄이었습니다.
후기 수공업은 상인이 물주로서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선대제가 일반적 양상.
자본을 가진 상인이 생산을 통제하면서 수공업자는 임노동자로 전락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초기 형태로, 노동 분화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상업의 확대를 이끌었지만, 노동 착취 문제도 심화되었습니다.
정조 때 통공정책으로 사상의 성장 및 서울에 자유시장(이현, 칠패, 종루), 지방에 객주, 여각 대두.
통공정책은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 경쟁을 촉진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상(私商)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상업 중심지가 형성되었습니다. 객주와 여각은 교통과 상거래의 중심으로 발전하며 경제의 역동성을 높였습니다.
후기 큰 상인의 독점적 도매업인 도고는 상인의 계층 분화를 유발.
도고는 상품 유통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중소 상인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이로 인해 상업계층 내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도고의 경제력은 지방 행정과도 결탁하여 부패 구조를 낳았습니다.
금난전권의 철폐로 시전상인은 사상의 침해를 크게 받았으나, 공인 침해 받지 않음.
정부의 보호 아래 있던 시전상인은 자유경쟁에 노출되면서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반면 국가 납품을 맡은 공인은 여전히 특권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상업 구조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후기 화폐의 전국유통은 상인, 지주의 축재 수단이 되었고, 이익은 폐전론 주장.
화폐경제의 확대는 상공업 발전을 이끌었지만, 일부 계층의 부의 집중을 낳았습니다. 물가 상승과 화폐 가치 하락으로 서민의 피해가 커지자 폐전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화폐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드러냈습니다.
실학파는 정통사림 문화의 한계성을 인식, 주기론, 서학, 고증학, 양명학 등을 수용.
실학자들은 성리학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현실 개선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외래 사상과 실증적 방법을 받아들여 지식의 폭을 넓혔습니다. 이는 근대적 사고의 싹을 틔운 사상적 혁신이었습니다.
실학은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균형으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 달성 운동이다.
실학은 이상보다 현실을 중시한 실천적 학문으로, 국가의 부강과 백성의 안정을 목표로 했습니다. 학문은 사회 개혁의 도구로 인식되었고, 과학·기술·경제 분야의 실용적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중농학파는 토지분배를 통한 자영농을 중심으로 병농일치와 사농일치를 주장했다.
이들은 농업 중심의 사회 질서를 복원하고, 백성이 자립해야 국가가 강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농업 생산력 향상을 위해 제도 개혁과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근대적 농정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중농학파의 선구는 유형원(균전론), 학파성립은 이익(한전론), 정약용은 집대상(여전제, 정전제).
유형원은 토지의 균등 분배를, 이익은 일정한 사유재산의 보장을 주장했습니다. 정약용은 이를 종합하여 공동 경작과 분배를 제시함으로써 이상적 사회 구조를 구체화했습니다. 세 사람의 사상은 조선 후기 개혁사상의 정수로 평가됩니다.
18c 후반, 상공업 중심의 개혁사상은 국가부의 근원을 상공업에 두자는 적극적 개혁.
이 시기의 사상은 농업 일변도의 경제관에서 벗어나 산업 전반의 발전을 강조했습니다. 상공업의 활성화가 곧 국력의 강화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자본 축적과 근대 경제관 형성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북학파(중상학파) 선구 유수원(우서)은 상인간의 합자, 상인의 생산 판매 주관, 상인의 지역사회 개발 등 주장.
유수원은 상인을 단순한 이익 추구자가 아닌 경제 발전의 주체로 보았습니다. 그는 합리적 경영과 협동을 강조하며, 상업의 사회적 책임까지 논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자본주의적 경제의식의 시초로 평가됩니다.
홍대용(균전론)은 의산문답에서 지전설을 주장하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임을 주장.
홍대용은 천문학과 철학을 결합하여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비판하고, 과학과 실용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합리적 사고는 조선 사상사의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실학시대 역사관은 국가인식의 폭 확대와 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탈피했다.
실학자들은 조선을 세계 속의 한 구성원으로 인식하며, 역사 서술의 시야를 확장했습니다. 그들은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발전시켜, 백성의 삶과 경제를 중시했습니다. 이는 근대적 역사 인식의 출발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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