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정리의 끝이 보입니다. 이번 편부터는, 시험에는 자주 나오지만 잘 안 외워지는 근대 이후의 한국사로 그중 오늘은 대한제국 편입니다.
광무개혁은 관제를 개혁하고, 신교육령을 반포(각종 학교 설립), 중추원 구성(민의 반영).
광무개혁은 자주 근대화의 기치 아래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교육 발전을 모색한 개혁이었습니다. 광무개혁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근대적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 했으며, 신교육령 반포를 통해 기술 교육과 실업 교육을 포함한 근대 학교를 대거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려 했습니다. 중추원의 설립은 법규 제정과 민의 수렴 기구를 마련하려 한 것이나, 실제로는 황실 중심의 제한적인 활동에 그쳤습니다.
광무개혁 시 경제면은 양전사업, 지계 발급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 시도 → 중단.
광무개혁은 근대적 경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토지 제도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양전사업을 통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지계를 발급하여 사유 재산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려 했으며, 이는 국가 재정 확보와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의 기초를 다지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재정 문제 등으로 사업이 중단되면서 근대적 개혁의 목표를 온전히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1차 영일동맹(1902)과 카 · 이 · 포 · 7 · 8 · 9는 을사늑약 이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위를 보여준다.
1차 영일동맹(1902)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는 외교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카쓰라-태프트 밀약(1905.7), 이차 영일동맹(1905.8), 포츠머스 조약(1905.9)은 각각 미국, 영국, 러시아의 승인을 받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인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외교적 노력들은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자, 열강들의 묵인 하에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의 발판을 마련했음을 상징합니다.
러시아 비밀외교는 <청러 공수동맹>, 조러관계<군사, 재정 고문 파견>, 러일관계<유사 시 완충지대>.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비밀 외교를 통해 일본과 대립했습니다. 청러 공수동맹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대한제국에는 군사 및 재정 고문을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고 친러 세력을 지원했습니다. 러일 관계에서는 대한제국을 러시아 세력 확장의 완충지대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결국 러일전쟁의 패배로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헌의6조는 예산 공표, 언론 집회, 출판자유 보장, 민회 설치 주장.
헌의6조는 독립협회가 주장한 것으로, 당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는 주요 강령이었습니다. 이는 국민의 참정권과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근대적 민주주의 원칙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국가 재정의 투명한 운영(예산 공표)**과 **국민의 정치 참여(민회 설치)**를 주장하여 전제 군주정에 대한 제한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일의 한반도 식민지화 계획안은 러일전쟁 중에 마련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마자 한반도 식민지화를 위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 계획안은 군사 점령을 영구적인 통치로 전환하기 위한 통감부 설치, 한국군의 해산, 사법권 및 경찰권의 장악 등 강제 병합의 단계적 절차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전쟁 승리를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적 승인을 바탕으로 침략을 가속화했음을 보여줍니다.
제1차 한일협약에서 고문으로 스티븐슨과 메가다(재정고문)가 파견되었다.
제1차 한일협약(1904)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 및 외교권을 사실상 장악하기 위한 기초 조치였습니다. 메가다는 재정 고문으로 파견되어 화폐 정리 사업 등 한국의 재정 정책을 일본에 유리하게 조정했으며, 스티븐슨 등은 외교 고문으로 파견되어 한국의 외교를 일본이 대리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이는 한국이 자주적으로 내정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나철, 오기호는 5적 암살단 조직과 대종교(1909)를 개창했다.
나철과 오기호는 을사늑약에 참여한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해 5적 암살단을 조직하며 무력 항일 투쟁을 시도했습니다. 이후 두 인물은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대종교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간도문제는 이중하를 토문감계사로,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
대한제국은 간도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행정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중하를 토문감계사로 파견하여 국경선을 조사하게 했고, 어윤중은 서북경략사로, 이범윤은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 지역의 조선인 보호와 행정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간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한일신협약(1907)은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퇴위와 더불어 강요하여 차관 정치 실시.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은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가 대한제국을 사실상 보호국화하기 위해 강요한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었고, 한국의 행정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는 차관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내정권과 행정권이 완전히 일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한일의정서(1904) 당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단체는 보안회(원세성, 송수만)이다.
보안회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한국의 황무지를 독점적으로 개발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항일 운동 단체입니다. 이들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대규모 대중 시위와 여론전을 펼쳤고, 결국 일본의 요구를 철회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애국계몽운동의 초기 성과이자 민족 경제 수호의 중요한 사례입니다.
의병의 발단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충청도 보은의 문석봉이 최초이다.
의병 운동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강제적으로 상투를 자르도록 한 명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습니다. 특히 단발령은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유생과 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왔으며, 충청도 보은의 문석봉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국가 위기에 대한 자발적인 민족적 저항을 상징합니다.
을사의병은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이 중심이다.
을사의병은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에 분노하여 일어난 의병 투쟁으로, 유생뿐 아니라 평민 출신도 참여했습니다. 최익현과 민종식은 유생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의병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신돌석과 같은 평민 의병장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며 의병 활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의병 운동이 전 계층의 항일 투쟁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해산된 군대의 의병 합류는 서울시위대, 원주진위대, 강화분견대가 중심이 되어 의병 전쟁화.
한일신협약(1907)에 따른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의병 운동을 '의병 전쟁'으로 발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은 우수한 군사 훈련과 무기를 갖추고 의병에 합류하여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습니다. 특히 서울시위대 등의 합류는 의병 활동을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무장 투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07년 12월 의병 연합전선은 각국 영사관에 교전단체 승인을 요청. 의병의 정치적 발전.
해산 군인의 합류로 전투력이 강화된 의병들은 전국적인 연합 부대를 형성하고 국제적 승인을 시도했습니다. 이들은 13도 창의군 등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는 한편, 각국 영사관에 교전단체로 승인을 요청하여 항일 투쟁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이는 의병 활동이 단순한 봉기를 넘어 국가 주권 회복을 위한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했음을 나타냅니다.
애국계몽운동은 경제 자립과 민족 교육 운동이 중심이다(중농학파의 영향).
애국계몽운동은 주권 침탈의 위기 상황에서 '실력 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 했던 사회 운동입니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산업 발전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강조했으며, 특히 중농학파의 영향을 받아 농업과 상공업 발전에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는 무장 투쟁과 달리 합법적, 평화적 방법으로 민족 역량을 강화하려 한 것이 특징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서상돈, 김광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 조직(부녀자와 언론-대한매일신보도 참여).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요한 막대한 국채를 국민들의 성금으로 갚아 국권을 회복하려 했던 경제적 구국 운동입니다. 서상돈과 김광제 등을 중심으로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부녀자들의 금가락지 모금과 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 보도를 통해 전 국민적인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으나 민족의 자립정신을 보여준 중요한 운동입니다.
보부상을 중심으로 일제 침략에 대항한 단체는 공진회이다.
공진회는 조선 시대부터 조직되어 온 보부상 조직을 근대적으로 개편하여 일제 침략에 맞선 단체입니다. 이들은 상업 활동을 통해 얻은 조직력과 대중적 기반을 바탕으로 일본 상인들의 침투를 저지하고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는 전통 상인 조직이 민족 경제 수호를 위한 근대적 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독립협회의 정신을 계승한 단체는 헌정연구회이고, 뒤에 대한자강회, 대한협회(대한민보)로 발전.
헌정연구회는 독립협회의 자유민권과 입헌군주제 정신을 계승하여 설립된 애국계몽단체입니다. 이들은 입헌 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으며, 이후 대한자강회는 교육과 산업 진흥에 집중하며 실력 양성을 강조했습니다. 대한협회는 기관지 대한민보를 발행하며 민족의식 고취와 언론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신민회(대한매일신보)는 비밀결사 단체로, 민족주의 교육, 민족산업 육성,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 추진.
신민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직된 비밀결사 형태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독립협회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학교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과 회사 설립을 통한 민족 산업 육성을 추진했으며, 궁극적으로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무장 투쟁까지 염두에 둔 종합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사상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통감부는 보안법, 신문지법, 출판법 등의 악법을 제정하고 애국계몽운동을 교란.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하고 민족 역량의 성장을 저해하기 위해 악법들을 제정했습니다. 보안법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제한했고, 신문지법과 출판법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여 민족의 계몽 활동을 근본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이러한 악법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위한 사전 작업이었습니다.
최초 신문(한성순보), 독립신문(독립협회), 민족주의 성격 강하(황성신문), 항일언론(대한매일신보-국채보상운동).
한성순보는 근대 최초의 신문으로 관보 성격이 강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순 한글판 신문이자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민중 계몽에 기여했습니다. 황성신문은 유생층이 주도하여 민족의식이 강한 논조를 펼쳤고,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을 내세워 일제의 검열을 피하며 국채보상운동 등 가장 강력한 항일 논조를 유지했습니다.
근대교육의 선구는 원산학사로 덕원 주민이 세워 근대 학술과 무술 교수.
원산학사는 근대 교육 기관의 선구적인 사례로, 국가 주도가 아닌 함경도 덕원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는 근대적인 학문뿐만 아니라 무술 교육까지 실시하여 실력 양성과 국방력 강화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는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자주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상설은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했고, 뒤에 김약연이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이상설은 러시아와 가까운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해외에서 민족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서전서숙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김약연이 이 서숙을 명동학교로 개칭하여 근대적 교육을 지속하며 민족 지도자를 양성했습니다. 이는 국외에서 이루어진 실력 양성 운동의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이시영은 서간도에 신흥학교를 설립했다 → 지청천 신흥무관학교.
이시영을 포함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들은 1910년 국권 피탈 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수많은 독립군 장교를 배출하는 무장 독립 투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 등 독립군 부대의 핵심 인력으로 활약했습니다.
신채호는 독사신론 등을 써서 민족의식 고취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신채호는 한국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인 '민족 사학'을 확립하여 민족의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대표 저서인 독사신론은 **역사를 민족의 '생명'**으로 보고 민족 중심의 자주적인 역사관을 제시했으며,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박은식은 최남선과 더불어 광문회를 만들어 민족의 고전을 정리 간행.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서를 통해 민족의 수난과 독립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 사학자입니다. 그는 최남선 등과 함께 광문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고전을 발굴하고 간행함으로써 민족 문화와 정신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이는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중요한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성명회 선언문(이상설, 유인석)은 1910년 일제국권침탈에 대하여 광복의 날까지 피의 투쟁 선언→일천황에 보냄.
성명회 선언문은 1910년 한일 병합에 대한 대한제국 유민들의 강력한 항의와 독립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이상설과 유인석 등 국외의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이 선언문은 일본 천황에게 직접 보내져 강제 병합의 부당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피를 흘려서라도 광복을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투쟁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한국사 암기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사(9) 조선후기(하) : 조선 후기 지리는 상업 경제, 문화적 관심 반영으로 상인이 주로 애용했다. (1) | 2025.10.19 |
|---|---|
| 한국사(8) 조선후기(상) : 16c 농장의 확대는 국가수입 감소, 농민 생활 궁핍, 소작농의 증가(병작반수제화) (1) | 2025.10.10 |
| 한국사(7) 조선전기 : 이성계의 요동정벌은 공민왕 때 요양 점령, 우왕 때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적 실권 장악 (1) | 2025.10.04 |
| 한국사(6) 고래시대 : 왕건은 호족, 6두품, 해상, 군진, 선종의 지원을 받았다. (1) | 2025.09.21 |
| 한국사(5) 통일신라시대 : 통일신라는 중대 신문왕 때 시중의 세력 강화, 녹읍의 폐지, 관료전지급, 9주5소경 (1) | 2025.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