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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9) 조선후기(하) : 조선 후기 지리는 상업 경제, 문화적 관심 반영으로 상인이 주로 애용했다.

by 토트마트 2025.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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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의 내용이 길어져 끝내지 못한 조선후기를 마저 설명하겠습니다.

 

조선 후기 지리는 상업 경제, 문화적 관심 반영으로 상인이 주로 애용했다.(김정호-대동여지도, 이중환-택리지)

조선 후기에는 실용적 지식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지리학이 상업과 문화 활동에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전국의 교통망과 지형을 정밀하게 표현하여 상인과 여행자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풍수와 생활환경을 고려한 주거지 선택 기준을 제시하며, 일반 민중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서는 단순한 학문적 성과를 넘어 실생활에 활용되며, 실학의 정신을 반영한 대표적 결과물로 평가됩니다. 특히 상업의 발달과 함께 지리 정보의 실용성이 강조되면서 지리학은 민간에서도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 저술, 북한산비 고증, 황초령비 판독, 세한도, 추사체 등.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학과 예술을 아우른 대표적 인물로, 금석학을 통해 고대 비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했습니다. 북한산비와 황초령비의 판독은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증 사례로 평가됩니다. 그는 또한 세한도를 통해 유배 중에도 꺾이지 않는 지식인의 절개를 표현했으며, 추사체라는 독창적 서체를 창안하여 예술적 경지를 높였습니다. 김정희의 활동은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선 후기 지식인의 이상을 구현한 사례로 남습니다. 그의 업적은 후대 실학자와 예술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 편찬된 한국학 백과사전임.

동국문헌비고는 조선의 역사, 지리, 제도, 문물 등을 총망라한 대규모 문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지식의 체계화를 시도한 결과물입니다. 영조는 문치주의를 강화하며 학문 진흥을 도모했고, 이 과정에서 동국문헌비고는 실용적 정보와 학술적 성과를 집대성한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책은 조선의 자주적 학문 전통을 정리하고, 후대 연구자들에게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한국학의 기초를 마련한 점에서 백과사전적 가치가 높으며, 실학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이는 조선 후기 국가 중심의 지식 관리와 보존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서학의 전래는 사신에 의해 학문적으로 수용. 성리학에 비판적인 북인 계열 중심.

서학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조선에 소개되었으며, 초기에는 천주교보다는 서양의 과학과 철학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북인 계열 학자들은 성리학의 경직성과 현실 부적응을 비판하며, 서학을 새로운 지식 체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특히 천문, 지리, 수학 등 실증적 학문에 관심을 보였고, 유교적 윤리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모색했습니다. 서학은 이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조선 사회의 윤리와 질서에 도전하게 되었고, 박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서학은 학문적 호기심과 개방적 사고의 산물로 평가됩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천주교와 불교의 차이를,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천주교와 유불도의 차이를 설명.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통해 다양한 외래 사상과 문화를 소개하며 조선 지식인의 시야를 넓혔습니다. 그는 천주교와 불교의 교리적 차이를 분석하며, 새로운 종교에 대한 이해를 시도했습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천주교를 유교와 불교의 관점에서 비교하며, 조선 사회의 종교적 다양성을 문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저작은 단순한 종교 소개를 넘어 사상적 충돌과 융합의 가능성을 탐색한 기록으로 평가됩니다. 특히 천주교에 대한 객관적 접근은 이후 신앙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사상 다양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조선 후기 의학은 정약용의 마과회통(부록-종두법),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에서 사상의설을 주장.

정약용은 마과회통에서 홍역 치료법을 정리하며, 부록으로 종두법을 소개해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서양의학의 일부를 수용한 사례로, 조선 의학의 실용성과 개방성을 보여줍니다. 이제마는 체질에 따라 치료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사상의학을 주장하며, 개인 중심의 의학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동의수세보원은 조선 의학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저작으로 평가됩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의학은 실용성과 이론의 균형 속에서 발전하며, 근대의학으로의 전환을 준비했습니다.

 

지전설은 김석문, 이익, 홍대용, 정약용이 주장하여 성리학 비판의 근거가 됨.

지전설은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한다는 서양의 천문학 이론으로, 조선 지식인들은 이를 통해 성리학의 우주관을 비판했습니다. 김석문은 최초로 이를 소개했고, 이익은 이를 통해 자연현상의 합리적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홍대용은 무한우주론을 주장하며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서려 했고, 정약용은 실학적 관점에서 이를 수용해 과학적 사고를 강화했습니다. 지전설은 조선 후기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세계관 수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17c 문학은 애국사상과 사회비판을 주로 했다.

17세기 조선은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을 겪으며 민족적 자존과 애국심이 문학에 반영되었습니다. 특히 시와 산문에서 국권 상실에 대한 분노와 회복 의지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동시에 사회의 모순과 부패에 대한 비판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양반 중심의 질서에 대한 반감이 문학적 표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문학은 단순한 감상적 표현을 넘어서 현실 참여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문학은 민족의식과 사회개혁 의지를 담은 중요한 사상적 통로가 되었습니다.

 

18c 문학은 창작의 주체가 상민층까지 확대되고 형식도 다양해졌다.

18세기에는 상업과 도시문화의 발달로 문학의 수요층이 확대되었고, 상민층도 창작의 주체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며, 기존 양반 중심의 문학과는 다른 현실적이고 서민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형식 면에서도 시조, 가사, 한문 산문 외에 국문 소설, 야담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문학의 대중화와 함께 표현 방식의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변화였습니다. 18세기 문학은 조선 후기 사회의 다양성과 문화적 역동성을 반영한 결과물로 평가됩니다.

 

19c 문학은 서민문학의 전성기로 판소리와 가곡이 국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19세기에는 판소리와 가곡 같은 공연 중심의 문학이 대중적 인기를 끌며 서민문화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판소리는 서민의 삶과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풍자와 해학을 통해 사회 비판의 기능도 수행했습니다. 가곡은 정서적 표현과 음악적 아름다움을 결합하여 상류층과 중산층 모두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이러한 문학은 문자 중심의 고전문학과 달리 구술성과 청중 참여를 중시하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19세기 문학은 조선 후기 문화의 저변 확대와 민중의식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7c 후반에서 18c 전반은 우리나라 바위산을 그리는 진경산수화 개척(정선-실학적 화풍) 금강산전도, 인왕재색도.

정선은 기존의 중국식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실제 조선의 자연을 묘사하는 진경산수화를 창안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금강산, 인왕산 등 실제 경관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실학적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조선의 자연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회화의 독자적 전통을 확립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정선의 화풍은 이후 민화와 풍속화에도 영향을 주며, 조선 후기 회화의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진경산수화는 단순한 미술 양식을 넘어 민족적 정체성과 현실 인식의 표현이었습니다.

 

18c 후반은 민족회화의 중흥기로서 서민 생활을 그린 김홍도, 양반과 부녀자를 그린 신윤복으로 대별.

김홍도는 서민의 일상과 노동, 놀이를 생동감 있게 그려 조선 후기 민중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그의 풍속화는 유머와 따뜻함을 담아 대중적 공감을 얻었으며, 민화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반면 신윤복은 양반 사회의 풍류와 여성의 섬세한 감성을 표현하며, 도시 상류층의 문화적 정서를 담았습니다. 두 화가는 각기 다른 시선을 통해 조선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화를 시각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시기 회화는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민족예술로 자리잡았습니다.

 

19c를 전후해서 상민과 노비 인구가 감소하자 정부에서는 공노비를 해방하여(1801년 순조), 상민수를 늘림.

19세기 초 조선은 인구 구조 변화와 재정 문제로 인해 노동력 확보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공노비 해방은 국가 소속 노비를 상민으로 편입시켜 세원 확대와 군역 확보를 위한 정책적 조치였습니다. 이는 노비제의 약화와 신분제의 동요를 촉진하며, 조선 후기 사회 구조 변화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특히 순조의 공노비 해방은 이후 민간 노비 해방 논의로 이어지며, 점진적 신분 해체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는 조선 후기 개혁의 일환으로 평가되며, 근대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조치였습니다.

 

19c 농민을 가장 어렵게 한 것은 환곡의 부담. 대원군 때 사창제(이익 주장했음)로 개혁됨.

환곡은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제도로, 원래는 농민 보호를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부패와 착취의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관리들의 횡포와 고리대금화된 환곡은 농민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원군은 이를 개혁하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했으며, 이는 이익이 주장한 지역 자치적 곡물 운영 방식이었습니다. 사창제는 환곡의 폐단을 줄이고, 농민의 부담을 완화하려는 실질적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행의 한계와 저항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정착되지는 못했습니다.

 

15c 도교는 훈구파에 의해 수용. 16c 사림파는 소격서 폐지. 17c에 독자적 계보 형성(환인, 단군을 시조로).

도교는 조선 초 훈구파에 의해 국가 제례와 길흉화복을 위한 실용적 신앙으로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는 유교적 순수성을 강조하며 도교적 요소를 배격했고, 그 결과 소격서가 폐지되었습니다. 17세기에는 도교가 민간 신앙과 결합되어 환인, 단군을 시조로 하는 독자적 계보를 형성하며 민족적 신화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는 도교가 제도권에서 밀려난 뒤에도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변형·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도교는 조선 후기 민족주의적 사상과도 일정한 접점을 가지게 됩니다.

 

도인들은 이론적 체계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도참과 연결되어 성리학에 강한 반발, 서민에 영향(문학, 민화).

도교적 신앙을 따르던 도인들은 철학적 체계보다는 예언과 길흉화복에 집중했으며, 도참사상과 결합되어 민간에서 널리 퍼졌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에 반발하며, 보다 자유롭고 직관적인 세계관을 제시했습니다. 도교는 민화, 설화, 무속 등 서민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고,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려는 정서적 위안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도참은 정치적 불만과 사회적 저항의 표현으로 기능하며, 민중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사상 다양화와 민간 신앙의 확산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천주교는 남인학자와 북학파 학자 가운데 일부가 신앙차원으로 발전(주체적).

천주교는 초기에는 서학으로 소개되었지만, 점차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며 조선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인과 북학파 학자들은 기존 유교 윤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천주교의 구세사상과 평등 이념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외래 사상이 아닌, 자주적 신앙으로 천주교를 수용하며 새로운 윤리 체계를 모색했습니다. 천주교는 인간 존엄과 내세관을 강조하며, 신분제 사회에 도전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종교적 다양성과 사상적 개방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흐름입니다.

 

그들은 유교 윤리에 구세복음사상을 가미하여 새로운 윤리 체계 수립 노력→전례 문제, 신분질서 유지 문제.

천주교 신자들은 유교의 가족 중심 윤리와 천주교의 구세복음사상을 융합하여 새로운 도덕 체계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상 제사 문제(전례 문제)와 신분 질서에 대한 도전은 조선 지배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천주교는 모든 인간의 평등과 내세 구원을 강조하며, 기존 유교 질서와 충돌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박해로 이어졌고, 천주교는 탄압받는 종교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조선 후기 사상과 윤리의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c 후반 동학은 교리상 복합적, 철학은 주기론에 가깝고, 사회사상은 인내천, 운수 혁명 사상.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의 요소를 융합한 복합적 교리를 지녔으며, 철학적으로는 기의 운동과 변화에 주목하는 주기론적 성격을 띱니다. 인내천은 인간을 하늘처럼 존귀하게 보는 사상으로, 기존 신분제를 부정하고 민중의 자각을 촉진했습니다. 운수 혁명 사상은 시대의 변화를 예고하며, 민중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동학은 종교를 넘어 사회개혁과 민중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농민봉기와 개혁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민중사상의 정점으로 평가됩니다.

 

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안으로 유교적 위민(중농학파)의 전제 왕권 확립, 밖으로 쇄국정책을 감행.

대원군은 내부적으로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농민 중심의 사회 안정과 왕권 강화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서원 철폐, 호포제 실시 등으로 양반의 특권을 제한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 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서양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문화적 자부심과 외세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원군의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질서 회복에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개화의 흐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개혁은 조선 후기 보수적 개혁의 대표 사례입니다.

 

대원군 개혁 중 양반의 반발이 가장 큰 것은 호포제 실시와 서원 철폐이다.

호포제는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제도로, 신분 특권을 침해하는 조치였습니다. 서원 철폐는 교육과 명분의 중심이었던 서원을 대거 정리하며, 양반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이 두 정책은 양반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대원군의 개혁이 한계에 부딪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서원 철폐는 유교적 명분과 연결되어 정치적 논쟁을 야기했습니다. 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양반의 저항을 무릅썼지만, 이후 개화파와의 갈등으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게 됩니다.

 

대원군 집권 전후에 중국은 뻬이징 조약, 러시아는 연해주 진출, 일본은 메이지 유신 등.

19세기 중반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로, 조선 역시 외교적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중국은 베이징 조약으로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하며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며 조선에 수교를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는 조선의 쇄국정책과 충돌하며, 외교적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대원군은 이를 막기 위해 강경한 대응을 했지만, 결국 조선은 개화와 외세 대응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무렵 상층은 위정척사, 하층은 동학, 또한 상중층에서 개화사상도 대두.

조선 후기 사회는 계층별로 서로 다른 사상과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상층 양반은 위정척사 사상을 통해 유교적 질서와 전통을 수호하려 했고, 하층 민중은 동학을 통해 사회개혁과 민중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중간 계층에서는 개화사상이 확산되며, 근대화와 문명 개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조선 사회의 변화와 대응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동학과 개화사상은 이후 개혁운동과 민중봉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병인양요 시는 한성근(문수산성), 양헌수(정족산성)가, 신미양요 시는 어재연(광성진)의 분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발한 프랑스와 미국의 무력 침입으로 발생했습니다. 한성근과 양헌수는 병인양요 당시 산성을 중심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고, 어재연은 신미양요에서 광성진을 사수하며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이들의 분전은 외세에 대한 조선의 자주적 대응을 상징하며, 민족적 자존심을 고취시켰습니다. 특히 어재연의 전사는 이후 항전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의병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사건은 조선이 외세의 위협에 직면했음을 보여주는 계기였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서양문물을 오랑캐 문화로 간주하는 동시에 우리 문화의 자부심에서 온 것이다.

대원군은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조선의 전통 질서를 위협하는 오랑캐 문화로 인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배타적 태도라기보다, 조선의 유교적 문화와 자주적 정체성에 대한 강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외세의 침투를 막고, 내부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쇄국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국제 정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개화의 흐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쇄국은 조선 후기 보수적 대응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고종 자신은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을 통하여 새로운 국제관계와 개화에 대한 식견을 가졌다.

고종은 즉위 초기부터 외교 사절단을 통해 국제 정세와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는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개화의 필요성과 세계 질서의 변화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식견은 이후 개화파의 등장과 근대화 정책 추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종은 점차 개화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며, 외국과의 수교와 제도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점차 폐쇄적 질서에서 벗어나 국제사회로 진입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조선과 새로운 수교 요구, 대원군의 거절로 정한론 대두→일시 후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통해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했고, 이에 일본 내에서는 무력 개입을 주장하는 정한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정한론은 조선을 침략 대상으로 보는 사상이었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국제적 여건을 고려해 일시적으로 후퇴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 긴장과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결국 일본과 수교하게 됩니다.

 

국내 개화세력 형성은 중국의 양무운동(해국도지, 영환지략)과 일본의 문명개화론에 영향을 받음.

조선의 개화세력은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통해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해국도지와 영환지략 같은 서양 문물 소개서가 국내에 유입되며, 지식인들은 과학기술과 제도 개혁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은 조선 개화파에게 실질적 모델이 되었고, 이를 통해 자강과 부국강병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외부 자극은 조선 내부의 개화 논의와 정책 추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개화사상은 이후 갑신정변과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개화사상은 1870년대(초기 개화파), 1880년대(갑신정변 주역), 1890년대(독립협회)로 구분.

조선의 개화사상은 시기별로 성격과 목표가 달랐습니다. 1870년대 초기 개화파는 자주적 문호개방과 서양 문물 수용을 주장했습니다. 1880년대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가 정치·사회 개혁을 통해 근대국가 수립을 시도했습니다. 1890년대에는 독립협회가 등장하여 민권 신장과 국권 수호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각 시기의 개화사상은 외세 대응과 내부 개혁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점차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는 사상적 흐름을 보여줍니다.

 

1870년대는 자주적 문호개방에, 1880년대는 부국강병을 위한 사회개혁에, 1890년대는 국권수호와 민권향상에.

1870년대 개화파는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 개방을 주장하며, 조선의 독립적 근대화를 모색했습니다. 1880년대에는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도입해 국가의 부강과 군사력 강화를 목표로 했습니다. 1890년대에는 외세의 침탈이 심화되자 국권을 지키고 국민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화사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처럼 개화사상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며,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각 시기의 개화는 정치·사회·외교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위정척사사상은 1860년대(병인양요시), 1870년대(강화도조약시), 1880년대(조선책략 유포시-이만손 만인소).

위정척사사상은 외세의 침입과 개화사상에 반대하며 유교적 질서와 자주성을 수호하려는 보수적 이념입니다. 병인양요 당시에는 천주교와 서양 세력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고, 강화도조약 체결 시에는 문호개방에 대한 반대가 중심이었습니다. 1880년대에는 조선책략이 유포되자 이만손 등이 만인소를 올리며 외세와의 협력에 반대했습니다. 위정척사는 시대별로 대응 방식은 달랐지만, 일관되게 전통과 자주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이후 의병운동과 민족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척사사상은 주리사상의 영향으로 보수적이지만, 민족과 주권을 지키려는 애국적 자주의식이 강하다→의병으로.

척사사상은 성리학의 주리설을 바탕으로 외세를 배격하고 전통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적 성격을 띱니다. 그러나 단순한 보수주의를 넘어서, 민족의 자주성과 주권을 수호하려는 강한 애국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외세 침탈에 맞서 의병운동으로 이어지며, 실천적 저항의 형태로 발전합니다. 척사사상은 유교적 명분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민중의 자발적 항쟁을 이끄는 사상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민족주의의 초기 형태로 평가됩니다.

 

초기 개화파들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군사기술과 산업조직에 관심.

초기 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핵심 요소로 인식했습니다. 이들은 군사력 강화와 산업 기반 확충을 통해 조선의 자주성과 경쟁력을 높이려 했습니다. 특히 병기 제조, 통신 기술, 기계 산업 등에 관심을 가지며 근대적 국가 체제 수립을 구상했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이후 갑신정변과 근대화 정책의 실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초기 개화파는 기술 중심의 실용주의를 통해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려 했습니다.

 

임오군란으로 최초로 고문(뮈렌도르프)이 파견되었으며, 일본군 주둔이 시작됨(제물포조약).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들의 차별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사건으로, 외국인과 개화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독일인 뮈렌도르프가 최초의 외교 고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자국인 피해를 이유로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외교 주권이 침해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열강의 간섭이 본격화됩니다. 임오군란은 개화와 외세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입니다.

 

갑신정변은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근대적 국민국가로의 표방(방법-전근대적).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한 사건입니다. 이들은 신분제 폐지, 재정 개혁, 군제 개편 등을 통해 국민 중심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실행 방식은 정변이라는 전근대적 수단에 의존했고, 외세의 지원에 기대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결국 3일 만에 실패하며 개화파는 몰락했지만, 근대국가 수립의 이상은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갑신정변은 조선 근대화의 초기 실험으로 평가됩니다.

 

갑신정변의 의의는 봉건체제를 근대적 체제로 변혁하려는 자발적 최초의 시도.

갑신정변은 조선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기존의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국가 체제를 수립하려 한 첫 시도였습니다. 이는 외세의 압력에 대응하는 동시에 내부 개혁을 통해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한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후 개화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갑신정변은 조선이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정치적 자각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개혁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남습니다.

 

러시아는 청의 뻬이징조약 시 연해주를 차지하고, 1884년 조선과 직접 수교, 1888년 두만강 운항권.

러시아는 청과의 베이징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확보하며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이후 조선과 직접 수교를 맺고, 두만강 운항권을 확보하며 경제적·군사적 진출을 본격화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북방 안보에 위협이 되었고, 열강 간의 세력 다툼 속에 조선의 외교적 입지가 흔들리게 됩니다. 러시아의 접근은 친러파 형성과 외교 갈등의 배경이 되었으며, 이후 아관파천 등 정치적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국제정세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880년대 일본은 경제적 침투에 주력했고, 농촌경제 파탄은 방곡령으로(1889).

1880년대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 이후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며, 곡물 수출을 통해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농민들의 생계가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1889년 방곡령을 내려 곡물 유출을 금지했지만, 일본의 반발로 외교적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방곡령은 조선이 경제적 자주권을 지키려는 시도였지만, 열강의 압력 앞에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이는 조선의 경제적 종속과 외교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890년대 동학에서, 보은 집회는 정치적 성격을 띰.

1890년대 동학은 단순한 종교운동을 넘어 정치적 성격을 띠며 민중의 권리와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보은 집회는 동학 교도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정부의 부패와 외세 침탈에 항의한 사건으로, 정치적 의사 표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이후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는 전초전 역할을 했으며, 민중의 조직력과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보은 집회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민중운동의 형태로 평가됩니다. 이는 조선 후기 민중의 정치적 각성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동학의 1차 봉기(고부민란 계기)는 남접 중심, 반봉건적, 황토현 승리, 전주성 점령, 폐정개혁안, 집강소 설치.

동학의 1차 봉기는 고부민란을 계기로 남접 중심의 농민들이 봉건적 착취에 저항하며 시작되었습니다.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며 정치적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폐정개혁안은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안을 담았고, 집강소는 자치적 행정기구로서 새로운 질서를 실험했습니다. 이 봉기는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개혁을 요구한 사례로, 조선 후기 사회운동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갑오개혁과 의병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학의 2차 봉기는 남접+북접, 반제국적, 우금치 실패.

2차 봉기는 청·일 전쟁으로 외세가 조선에 개입하자, 동학 교도들이 반제국적 성격으로 다시 봉기한 사건입니다.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하며 진압되었습니다. 이 봉기는 외세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며, 이후 항일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동학은 종교를 넘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며, 근대 민중사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2차 봉기는 조선의 주권과 민중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문벌타파, 인재등용은 갑신정변, 동학운동, 갑오개혁의 공통 사항이다.

갑신정변, 동학운동, 갑오개혁은 모두 기존의 문벌 중심 사회를 타파하고,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신분제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적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공통된 개혁 방향이었습니다. 특히 동학은 인내천 사상을 통해 인간 존엄을 강조했고, 갑오개혁은 제도적으로 신분 폐지를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독립협회와 근대 민권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문벌타파는 조선 후기 개혁운동의 핵심 과제였습니다.

 

갑오개혁(국국기무처)는 타율적이라 군제개혁이 못 이루어졌고, 국민의 심한 반발을 샀다.

갑오개혁은 일본의 영향 아래 추진된 개혁으로, 자주적 개혁이라기보다는 외세 주도의 타율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국국기무처를 중심으로 행정, 재정,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군제개편은 일본의 간섭과 내부 저항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특히 단발령과 같은 급진적 조치는 국민의 문화적 정체성과 전통을 침해하며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개혁의 방향은 근대화를 지향했지만, 실행 방식과 외세 의존으로 인해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갑오개혁은 조선 근대화의 첫 시도였지만, 한계와 갈등을 동시에 드러낸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홍범14조에는 입법권, 민권 언급이 없다→독립협회 가서야.

홍범14조는 갑오개혁의 연장선에서 발표된 근대적 개혁 문서로, 국가 운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입법권과 민권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어 국민의 권리 보장 측면에서는 미흡했습니다. 이는 여전히 왕권 중심의 개혁이었음을 보여주며, 근대 헌법으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했습니다. 이후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비로소 입헌주의와 민권 중심의 정치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됩니다. 홍범14조는 조선 헌정사에서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민권의 실질적 보장은 이후로 미뤄졌습니다.

 

종두법 실시와 소학교 설치는 을미개혁 때이다(태양력, 건양, 종두법, 소학교, 우편사무, 단발령, 군제개편).

을미개혁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친일 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으로, 근대적 제도 도입이 핵심이었습니다. 태양력 채택과 건양 연호 사용은 시간 체계의 근대화를 의미했고, 종두법은 전염병 예방을 위한 의학적 진보였습니다. 소학교 설치는 교육의 대중화와 근대 교육 체계의 시작을 알리는 조치였습니다. 우편제도 도입과 군제 개편도 이루어졌지만, 단발령은 국민의 전통을 침해하며 큰 저항을 받았습니다. 을미개혁은 근대화를 향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외세 주도와 국민 반발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독립협회 활동(1896-1898)을 전후로 일반국민의 근대 문명에 대한 각성이 높아졌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과 민권 신장을 목표로 활동하며, 일반 국민에게 근대 문명과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알렸습니다. 협회는 토론회, 강연, 신문 발행 등을 통해 국민 계몽에 힘썼고, 만민공동회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의사 표현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국민의 자각을 촉진하며, 근대 시민의식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자유, 평등, 자강의 가치가 널리 퍼지면서 조선 사회는 점차 근대적 사고로 전환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조선 후기 민권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친러내각은 삼국간섭 때(3차 김홍집 내각)와 아관파천 후(윤용선 내각)에 성립→이권 많이 침탈.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조선은 러시아에 의존하며 친러내각을 구성했습니다. 특히 아관파천 이후 윤용선 내각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친러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광산, 철도, 항만 등 주요 이권을 침탈하며 조선의 경제적 주권을 위협했습니다. 친러내각은 외세 의존의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이후 반외세 운동의 배경이 됩니다. 이는 조선이 국제정세 속에서 자주 외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자주호국선언(1898.2, 135명이 상소 형식 구국선언)은 밖으로 자립, 안으로 자주.

자주호국선언은 독립협회 회원 135명이 상소 형식으로 발표한 구국 선언문으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자주적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이들은 조선이 외교적으로 자립하고, 내부적으로는 민권과 자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언은 국민의 정치 참여와 국가의 독립을 동시에 강조하며, 근대적 민족주의의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이는 독립협회의 사상적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며, 이후 헌정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자주호국선언은 조선 후기 자주적 근대화 의지의 상징입니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 자유민권, 자강개혁 중심의 자주적 근대사상.

독립협회는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독립을 핵심 가치로 삼고, 국민의 권리 보장과 정치 참여 확대를 추구했습니다. 자유민권은 언론, 집회, 표현의 자유를 포함하며,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자강개혁은 교육, 산업, 군사 등 국가 역량 강화를 통해 외세에 대응하려는 실천적 개혁 방향이었습니다. 협회는 만민공동회와 헌의6조 등을 통해 구체적 개혁안을 제시하며, 조선 근대화의 중심 세력으로 활동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조선 후기 자주적 근대사상의 결정체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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