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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암기법

한국사(6) 고래시대 : 왕건은 호족, 6두품, 해상, 군진, 선종의 지원을 받았다.

by 토트마트 2025.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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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사 6번째 시간.  고려시대를 정리해드리겠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특별히 두문자로 정리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대신 10세기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각 세기별로 대표 세력이 누구였는지를 두문자로 정리한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0호 문무권신 관사서노세 : 10(10c 호족의 시대) 11c부터 문무권신 관사서노세(11문신.12무신.13권문세족.14신진사대부.15관학파.16사림.17서인.18노론.19세도정치). 11세기부터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외우면 각 세기마다 한반도를 대표하였던 세력의 흐름이 어떻게 변천되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경이최최 중도중도정 : 12c 무신정권 중 최씨정권의 정치적 배경은, 교정도감·정방·서방, 군사적 배경은 도방·삼별초입니다. 그 밖의 각 무신정권의 집권자와 정치적 배경을 두문자로 연결한 것이 '정경이최최 중도중도정'입니다. 즉, 정중부, 경대승, 이의방, 최충헌, 최의가 각각 중방, 도방, 중방, 도방, 정방이 각 집권자의 주요 기구입니다. 다만, 중방과 정방은 정치기구이지만, 도방은 사병 기구입니다. 경대승이 최초로 만들었고 사후 해체되었지만, 최충헌 때 다시 만들어져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 최종적으로 해체됩니다. 정방은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담당 기구입니다. 두문자가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워낙 헷갈리는 부분이라서 이렇게 외운 후 정리하는 것도 차선의 방법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1126 이자겸의 난, 1135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1170 무신정변도 12세기 중요한 연도로서 외워두면 좋습니다.

 

왕건은 호족, 6두품, 해상, 군진, 선종의 지원을 받았다.

왕건은 출신지 송악(개성)의 지역 호족이었고, 각지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연합적 지배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사성(성씨 하사), 역분전 지급 등 포용 정책을 통해 호족을 통합해 왕조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신라의 6두품 출신 귀족들을 끌어들여 신라의 기존 질서와 연계성을 유지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서해안의 해상 무역과 해군력을 장악, 특히 장보고의 후예 등과 연합해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지방의 군사 거점(군진)을 통합하여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군사력을 확보했습니다.

선종 승려들의 정신적·이념적 지원을 받아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심을 안정시켰습니다.


왕건은 조세감면과 노비해방 등의 애민정책으로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태조의 호족통합은 결혼정책, 기인제도, 사심관제도(→유향소) 등을 썼고 지방은 자치토록 했다.

왕건(고려 태조)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세 감면과 노비 해방과 같은 애민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고려의 통치 기반을 안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태조는 서경중시. 거란에 강경책을 쓰면서 말기에 청천강에서 영흥까지 확보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을 중시하며 이를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거점으로 삼았고, 거란(요나라)에 대해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말년에 청천강에서 영흥(현재의 영원, 함경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한 것은 그의 북방 확장 정책의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태조는 왕실의 안전과 국가발전을 위해 훈요10조에서 숭불과 지리도참설을 강조. 정계계백료서-신하의 도리.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아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또한, 훈요십조에는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 즉 풍수지리와 도참 사상에 기반한 통치 철학이 반영되었습니다.

정계계백료서는 태조가 신하들에게 국가 통치와 충성의 도리를 강조한 문서입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신구세력 교체로 왕권을 강화했다.

이 두 정책은 광종이 신구 세력 교체를 통해 지방 호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확립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보다 안정적이고 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경종 때 국가적 규모의 시정전시과가 시행되었다.

시정전시과는 고려 전기 최초의 체계적 토지 분배 제도로서, 976년(경종 1년)에 제정되어 중앙 관료들에게 전지(논밭)와 시지(땔감 산림)에 대한 수조권을 부여하는 제도였습니다.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28조에 따라 정치는 유교, 수신은 불교가 맡게 되었다.

성종은 시무28조를 국정 개혁의 지침으로 삼아 유교적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관학(국자감) 진흥, 지방관 파견, 중앙집권 강화를 추진했습니다. 동시에 불교 행사와 사찰 경제를 제한해 국가 주도권을 강화했으나, 신앙적 측면에서는 불교의 역할을 인정하는 양면성을 유지했습니다.


성종 때 교육조서 반포는 성종의 국자감 설치, 지방에 박사 파견, 문신월과법으로 이어짐.

성종은 통치 초기에 유교에 입각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육조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교육조서에는 “교육이 아니면 인재를 얻을 수 없다”는 원칙이 담겨 있었고, 국가의 부강과 왕실 안정을 위해 모든 신하와 백성이 교육에 힘써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도병마사는 재추 합좌의결 기구이고, 대성은 낭사와 어사대로 구성. 왕권을 견제했다.

도병마사는 중서문하성 재신(宰臣)과 중추원 추밀(樞密)이 모여 운영한 합좌기구로, 고려 군사·정치의 중요 사안과 국가 중대사를 합의로 결정했습니다. 대성은 '낭사'(중서문하성의 관원)와 '어사대'(감찰 기관, 곧 고려 대간)로 구성되어, 간쟁·봉박(왕명 집행 거부)·서경(관리 임명 동의권) 기능을 통해 왕권과 귀족권력을 견제했습니다.


고려 지방 행정의 특징은 속현이 더 많고, 향리로 하여금 실제 행정을 담당케 했다.

고려 지방 행정 체계에서 주현(州·군·현)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직접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속현(소속 현·부락 등)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고, 주현의 수령이 속현 전체를 통할하는 형태였습니다.


고려의 중앙군인 2군6위는 직업군인이고 지방군인 주현군은 농민의무병이다.

2군(응양군·용호군), 6위(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로 구성된 중앙군은 수도 방위와 국경 수비를 담당하는 직업형 군인 집단이었습니다. 주현군은 전국의 주·현에 조직된 지방군으로, 주요 병력은 토지에 속한 농민으로 충원되는 의무병 형태였습니다.


음서제도는 고려족벌귀족의 정치적 특권이고 공음전은 경제적 특권이다.

음서(蔭敍)는 5품 이상의 관직자, 공신, 왕족의 후손이 과거 시험 없이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한 제도입니다. 공음전(公廕田)은 5품 이상 문반 귀족에게 지급된 토지로, 세습이 가능하여 귀족 집단의 경제적 기반이었습니다.


문종 때 최충의 9재학당은 사학12도의 발전을, 관학을 침체케 했다.

최충의 명성과 실질적인 과거 합격 노하우, 교육 체계 덕분에 명문가 자제들이 몰려들며 과거 합격자 대다수가 9재학당 출신으로 채워졌고, 이후 고관들도 경쟁적으로 사학(私學)을 설립해 사학12도가 형성되었습니다. 11세기 후반 관학, 특히 국자감은 교육 여건이 형식화되어 실질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나, 사학(특히 9재학당)은 현실적 교육 수요를 충족했고 인맥 형성·정치 네트워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관학 진흥책은 숙종 때 서적포, 예종 때 관학7재와 양현고, 인종 때 향학 설치이다.

서적포는 국가가 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보급하거나, 서적 구입을 지원하는 제도로, 유교 경전과 학문 자료의 확산을 통해 관학의 기반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예종은 관학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관학7재를 설치하여 국자감 내에 7개의 학당을 두고 유교 교육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사학12도와 경쟁할 수 있는 관학의 교육 체계를 구축하려는 목적이었으며, 인재 양성의 질을 높였습니다. 또한, 양현고는 학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금으로, 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학업을 돕고 관료 양성을 촉진했습니다.


고려 토지는 소유권은 국가가, 경작권은 농민이 수조권은 국가나 개인이 가진다.

전시과 등 토지제도 하의 토지는 본질적으로 국가(또는 공공)가 소유 주체였습니다. 관료나 관청에 직접 “토지의 소유”라기보다는 “토지의 사용권 또는 수조권”이 부여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전시과 토지, 공음전 등은 일정한 관직자, 관청, 사원, 군인 등에게 수조권(거두어들일 권리)이 분배되었습니다. 즉, 실수익자인 ‘수조권자’가 농민이 생산한 곡물·조세의 일부를 수취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사회는 대가족 중심으로 편제되고, 조세·역·공물도 대가족 단위로 부과했다.

고려 시대의 사회는 유교적 가족관과 전통적 씨족 사회의 영향을 받아 대가족 단위로 조직되었습니다. 대가족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로, 가문의 유지와 상호 부양을 중시했으며, 이는 농촌 사회의 기본 단위로 기능했습니다. 특히 호족이나 귀족 가문은 대가족 체제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국가의 조세, 역, 공물 등 세금 및 부역 등은 개별인(개인)별이 아니라 ‘호(戶)’ 중심으로 부과되었는데, ‘호’는 실제 거주하는 대가족 단위로 파악되었습니다.


고려는 지방호족들이 공로나 과거로 중앙귀족화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문화교류 활발.

고려 왕조는 건국 후 각지의 유력 호족들을 혼인정책, 공신 책봉, 사성(성씨 하사), 역분전 하사 등의 우대책으로 중앙의 통합 질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호족들의 중앙 진출은 인맥, 혼인, 관직 인사 등 여러 방면에서 지역 전통문화를 개경 중앙에 유입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중앙의 유교·불교·제도문화도 지방에 확산시켰습니다.


고려사회는 관습법 중심사회이며, 지방관이 크게 주어져 자치질서를 인정.

국가에서 제정한 당률(법률)은 71조로 기본 골격이 있었으나, 일상생활과 민사관계는 대부분 지역 관습법을 따랐으며, 명문화된 법률은 관습을 보완하는 정도였습니다. 지방관(수령)은 대개 큰 사건만 중앙에 보고했으며, 대부분의 행정·사법 사안은 현지에서 관습과 자치질서에 따라 직접 처리했습니다.


팔관회는 불교와 재래신앙의 융합 제전으로 개경과 서경에서 열리고 국왕도 참석.


고려 사회는 고리대업이 성행했고, 이식으로 공공사업을 하는 보가 발달했다.

고려에서는 곡물이나 포(베) 등 생필품, 곡식, 현물 위주의 고리대금(이자를 얹어 빌려주는 대부)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보는 지역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일종의 자치적 경제 단위로, 이식으로 얻은 자금을 활용해 공공사업(예: 도로, 제방, 관개시설 건설 등)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지방의 자치적 질서를 유지하고, 지역 사회의 경제적·사회적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농업 기반 사회에서 수리 시설의 유지와 보수는 지역 경제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성종 때 건원중보와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의 건의(주전도감)로 활구·동국통보 등이 주조되었으나 유통은 부진.


고려 문화 성격은 호족중심, 유불융합, 문화폭 확대, 귀족공예 중심을 들 수 있다.

고려 문화는 유교와 불교가 융합된 독특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유교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기반으로 작용했으며(예: 과거제도, 국자감), 불교는 민심 안정과 정신적 수양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예: 선종, 사찰 건립). 이 두 사상은 상호 보완적으로 고려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고려의 공예는 귀족 계층의 후원 아래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청자, 금속 공예, 불교 미술(예: 불상, 탑) 등이 귀족적 취향과 정교한 기술을 반영하며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고려 청자는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했습니다.


고려 유학과 한문학은 초기 자주적·독자적 성격(심시문, 김심언)에서 중기 보수적·사대적(최충, 김부식)으로.

고려 초~성종 시기 유학자는 최승로, 김심언 등으로, 이들은 유교 원리를 사회 개혁과 새로운 문화 창조의 근본으로 삼으려 했고, 국가와 사회를 보다 주체적으로 이끌려는 자주적·실천적 학풍이 강했습니다.

문종 이후 최충, 김부식 등은 유학을 문벌귀족 보존, 권력 유지 도구로 삼으면서 보수적·사대적 성격이 강화되었습니다.


고려의 도교와 풍수지리 사상은 민간생활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도교적 의례는 국가 제사(예: 팔관회)나 민간의 질병 치유, 액막이 같은 주술적 행사에서 두드러졌으며, 민간 신앙과 결합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고려의 민간신앙은 불교, 도교, 샤머니즘이 한데 섞인 기복신앙으로 되었다.


고려의 석탑은 신라계통에서 이탈, 여러가지 형태가 시도되었다.

통일신라 석탑은 사각 평면의 3층 석탑이 정형이었으나, 고려시대 석탑은 6각·8각 등 다각형 평면, 다층(5층 이상) 구조 등 여러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습니다.


고려의 불상(소조아미타여래좌상)과 범종은 신라양식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고려 전기 불상은 통일신라 양식의 사실적·이상적 조형미와 엄격한 전통을 이어받아, 세부적인 조각 수법과 포즈,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신라 불상과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고려 범종도 신라 범종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형태와 문양, 음향 기술에서 신라 계통의 양식을 계승하는 작품이 많았습니다.


고려자기는 9c(신라토기가 자기로), 10c(중국기법유입), 11c(순수청자), 12c(상감청자)로.


11c 거란과의 화친은 북진 보류, 12c 여진에 굴복은 북진의 좌절 의미.

고려는 태조 이래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정책을 꾸준히 추진하며 서북지역(강동6주)까지 영토를 넓혔지만, 993년~1019년의 세 차례 거란(요) 침입 이후, 현종 때 거란과 강화를 맺어 압록강~청천강까지의 영역을 인정받음으로써 실질적인 영토 확장 시도는 중단되었습니다.

12세기 초,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자, 고려는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열세에 놓였습니다. 특히 의종과 고종 시기, 금나라의 압박으로 인해 고려는 여진에게 굴복(예: 1126년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신하 관계를 맺음)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고려의 북진 정책이 사실상 좌절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금나라의 강력한 군사력과 압박 앞에서 고려는 북방 영토 확장(특히 함경도 및 압록강 유역)을 포기하고, 실질적으로 금나라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습니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풍수지리·불교·낭가-금국정벌, 서경천도)을 조선사 1천년래의 제1대 사건으로 평가했다.


대각국사 의천은 천태종 개창, 속장경 간행(3차 몽고침입 때 소실), 화폐주조를 건의했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의 분쟁을 화합하기 위해 귀국 이후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고, 고려 숙종 2년(1097)에 천태종(天台宗, 해동 천태종)을 공식 개창했습니다. “교관겸수”(교학과 선 수행의 융합)를 강조하는 천태 재단으로 불교 통합과 실천적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의천은 송나라 등지에서 대량의 불교 경전과 주석서(속장)를 수집하여 흥왕사 교장도감에서 속장경(교장) 3000여 권을 간행하는 사업을 주도했습니다. 의천은 경제적 안정과 상업 활성화를 위해 화폐 주조를 건의했습니다. 이는 고려 사회에서 물물교환 중심의 경제를 보완하고,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비록 그의 건의가 즉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고려 후기 화폐 경제의 발전(예: 은병, 해동통보)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묘청은 풍수설, 불교사상, 낭가사상에 결부된 전통사상의 입장에서 유교정치 사상을 비판.


고려의 주도세력은 나말호족에서 문벌귀족으로, 무신정권으로, 권문세가로, 신진사대부로.

서두에서 이야기한, 세기별 주도세력 10호 문무권신 관사서노세는, 이 문장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12세기 무신정권은, 1170년 무신정변부터 시작이니, 정확히는 12세기말, 마찬가지로 권문세가는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 간섭기부터 시작이니 13세기말, 신진사대부는 권문세가를 비판하면서 개혁 유학자 세력이 등장하여 조선 건국(1392년)을 하기 전까지인 14세기말이 되어, 조금 조정해서 외워둘 필요가 있습니다.


최씨정권은 시무10여조의 개혁방안을 제시했으나 실질적인 개혁은 없었다.


최씨정권의 정치적 배경은 교정도감·정방·서방, 군사적 배경은 도방·삼별초이다.

교정도감(敎定都監): 최충헌이 만든 최고 권력 집행기구로, 국가의 주요 정책과 행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정방(政房): 인사권을 장악한 기관으로, 최씨일가가 관료 인사와 정부 부처 인사권을 독점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서방(西房): 최씨정권을 보좌할 문신 집단(정무참모 조직)으로, 문신을 기용해 무신 중심 체제를 보완했습니다.

도방(都房): 최충헌이 개인적으로 조직한 사병 집단으로, 집권 초기부터 자신과 가문의 신변 보호 및 권력 기반 확보에 활용했습니다. 이로써 무력 기반이 강화되었습니다.

삼별초(三別抄): 몽골 침입기 특별히 조직된 특수 군사부대로, 본래 야별초로 출발하여 좌별초·우별초·신의군(삼별초)로 편제, 집권층의 무력 행사를 담당했습니다. 대몽 항전의 핵심 전력이기도 했습니다.

 

최씨정권은 교종계통의 사원을 누르고 새로 성립된 조계종(선종바탕으로 교종 흡수)을 지원했다.


고려, 몽고의 첫접촉은 강동의 역이고 6차례 침입했다.(1231-1270)

1219년 강동성 전투가 몽골과 고려의 첫 공식 외교적 접촉이며, 이후 6차례 침입이 고려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고려와 몽고의 첫 공식적인 접촉은 1219년 강동성(강동의 역) 전투에서 이뤄졌습니다. 이후 몽골은 고려에 대해 6차례의 대규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몽고의 내정간섭기군는 정동행성(공민왕 폐지), 다루가치(공물수탈), 순마소(감시기관)이다.


친원파 권문세가는 도평의사사를 통해 정치를 장악하고 거대한 농장을 소유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고려 후기 최고 합의 의결기관으로, 권문세가의 주요 구성원들이 이 기구를 주도하며 국정 전반을 합좌해 결정했습니다. 그에 따라,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도평의사사를 통해 권문세가가 인사권·정책결정권 등 실질적인 행정권을 독점했습니다.

권문세가는 과거·음서 등을 통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원나라와 결탁하는 등 정치적 권력을 활용해 광대한 농장(장원)을 소유했습니다.


원에서 들어온 것은 성리학, 목면, 화약, 역법(수시력), 송설체, 라마교(경천사10층석탁) 등이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관제복구, 정동행성 폐지, 몽고풍 폐지, 쌍성총관부 회복, 요동정벌 등이다.

관제 복구: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었던 관제와 관청 이름을 문종 때 체제로 복구, 황제국 체제의 회복을 선언했습니다.
정동행성(이문소) 폐지: 원이 내정 간섭을 위해 설치한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해 고려의 사법권과 자치를 회복했습니다.
몽고풍(몽골식 풍속) 폐지: 몽골식 변발·복식 등 몽골풍의 관습과 문화를 금지하여 자주성을 강조했습니다.
쌍성총관부 회복: 동북면병마사 유인우, 이자춘, 이성계 등이 압록강 이북 쌍성총관부 일대를 무력으로 수복해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요동정벌: 고구려 옛 영토 회복을 목표로 요동(요하) 지방을 공략하려 시도했습니다


공민왕의 내정개혁은 정방 폐지, 과거제 정비, 전민변정도감(불법토지, 노비개혁)으로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정방 폐지: 인사권 독점기구인 정방을 혁파해 왕권을 직접 관장하고 관료 인사를 정비하려 했습니다.
과거제 정비: 신진 사대부의 등용 통로였던 과거제도를 강화해, 집권층의 기반을 갱신하고자 했습니다.
전민변정도감: 신돈을 기용해 권문세족이 탈점(강탈)한 토지의 환수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의 해방, 즉 불법 농장 정비와 노비 해방 등 토지·신분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공민왕 개혁정치의 실패원인은, 개혁 추진 세력이 미약, 원의 압력, 홍건적·왜구의 침입 등이다.

강력한 권문세족의 반발, 신돈의 제거, 공민왕 시해, 그리고 홍건적·왜구의 혼란 등으로 통치기반이 약화되면서 개혁은 좌절되었습니다. 개혁의 한계로, 일부 신흠 계층(신진사대부)의 성장이라는 성과가 남았으나 구조적 문제 해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왜구와의 싸움은 황산(이성계), 홍산(최영), 진포(최무선) 등이 있고, 박위는 쓰시마 정벌, 정몽주는 외교적 교섭.


신진사대부는 지방 향리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신진사대부는 주로 지방의 향리 계층이나 중소 지주 출신이 많았으며, 과거제 합격을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들은 기존 권문세족(귀족층)과 달리 불교 중심 구체제를 비판하고, 성리학(유학의 한 분파)을 새로운 이념으로 받아들이며, 사회 및 정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안향이 원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뒤 공민왕대에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정도전·조준 등 인물들이 조선 개국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여말에는 인도 선종(지공)의 전래, 임제종(보우)의 전래, 라마교의 전래, 성리학이 전래되었다.


고려시대 유교의식의 보급은 여말 성리학의 전래와 더불어 주문공가례, 가묘 등이다.


성리학은 소개(안향)→원에서 직접 수입(백이정, 박충좌)→철학적 이해심화(정몽주)→개혁정치(정도전, 조준)

도입과 소개(안향): 충렬왕 때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성리학을 접하고 귀국하여 성균관 교육 및 보급을 추진했습니다.
직접 수입(백이정, 박충좌): 백이정, 박충좌 등은 원나라에 장기간 체류하며 정주학의 경전과 주석서를 다량 취득, 성리학을 더 체계적으로 익혀 귀국 후 후학에 전수하였습니다.
철학적 이해 심화(정몽주): 성균관 등에서 성리학 강론과 토론이 활발해지며, 정몽주 등의 학자는 이론적·철학적으로 성리학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깊이를 더했습니다.
개혁 정치로 발전(정도전, 조준):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국가 개혁의 이념으로 삼아 사회·제도 개혁, 조선 건국의 핵심 사상으로 구현하였습니다.


삼국유사(충렬왕)는 불교의 입장에서 전통자주사관(야사체), 단국신화수록(민족자주의식).


이제현은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 사관의 고려국사 저술(중단)→조선에 영향(정도전고려국사)

이제현은 고려에서 정통론(정통 왕조 계승의식)과 명분론(대의명분)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성리학 이념에서 출발한 ‘명분 중심의 역사서술’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기전체 역사서인 《고려국사》를 편찬하였으나, 원고 일부만 남고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왕권의 존엄, 신하의 충성, 인재 등용의 중요성, 통치의 도리를 강조하는 등 왕도 정치와 도덕적 합리성을 옹호하는 성리학적 관점이 강조됩니다.
이러한 역사관은 후대 조선의 정도전이 《고려국사》를 저술할 때 기초가 되었고, 조선 성리학적 사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려후기 한문학은 전기보다 세련되었으며 이규보(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 상정고금예문, 신품4현). 진화가 중요.


공민왕의 천산대렵도는 원대 북화의 영향을 받음. 여말에 수백점의 불화가 일본에 전래됨.(혜허의 양류관음상)


고려 기술학은 일반적으로 천시되었으나 출판문화는 세계 제1이다. 천문은 서운관, 의학은 태의감.


고려 불교는 초기 교선대립에서, 중기 교선일치(천태종)로, 후기 선교일치(조계종)로 발전하였다.

고려 초기는 신라 말의 교종(화엄·법상 등)과 선종(가지산문 등 9산)이 양립‧경쟁하며, 교학 중심 왕실·귀족 불교와 참선 수도 중심 산중 불교가 각각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선종은 호족의 지원으로 지방 중심으로 성장했고, 교종은 중앙의 국찰을 중심으로 존속했습니다.
문종~숙종대 의천(대각국사)은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조화하기 위해 송과 고려의 선(禪), 교(敎), 밀(密) 사상을 종합해 천태종을 개창하고, ‘교관겸수’로 교(이론)와 관(수행)의 통합을 주창했습니다. 천태종은 교종 중심이긴 하지만 선종의 수행형식도 인정하는 융합적 불교 사조의 전형입니다.
고려 후기 보조국사 지눌은 구산 선문을 통합해 조계종(曹溪宗)을 창립, ‘돈오점수’, ‘정혜쌍수’라는 선종 중심의 실천철학을 통해 선(참선)과 교(이론)의 융합을 한층 더 발전시켰습니다.


여말 농서는 원의 농서인 농상집요가 소개되었고, 선초에는 우리 농서인 정초의 농사직설이 저술됨.


여말의 농법은 2년3작의 윤작법과 우경에 의한 심경법, 선초에는 시비법과 이앙법(일부), 선후기 밭농사 견종법.

2년 3작 윤작법: 밭을 두 해 동안 세 번 바꿔 경작하는 체계로, 한 땅에서 몇 종의 작물을 번갈아 심어 지력을 유지하고 수확량을 늘렸습니다.
우경(심경법): 소를 이용해 깊게 갈아엎는 방법으로, 땅을 깊게 파 경작층을 두껍게 해 지력(토양 비옥도)을 높이고 작물 성장에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선초(조선 전기) 시비법: 분뇨·짚‧풀‧거름‧재 등 여러 비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시비법(비료주기)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앙법 일부 도입: 이앙법(모내기)이 전남 등지 일부 벼농사 지역에 도입되어, 논에서 모를 길러 옮겨 심음으로써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고 이모작 가능성이 확대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견종법: 밭농사에서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고랑에 씨앗을 뿌리는 방식) 씨앗의 낭비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경작하는 견종법이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말에서 조선 후기까지 농사법을 한꺼번에 정리해보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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